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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개인이 이끄는 운동들

 

 

5) 개인이 이끄는 운동들

 

2000년대 들어 운동 방식과 주체들의 모습도 이전과 달라졌다. 이런 현상은 2008년에 촛불 시위를 거치며 더 분명해졌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2002년을 전후로 요즘 시민단체들은 뭐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요즘 경실련은 뭐하지?”라는 말을 들었던 1990년대의 데자뷰 같다. 경실련이 제기했던 주요 의제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제도화되면서 경실련의 새로운 의제들이 눈에 띄지 않았던 까닭이다. 당시 경실련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던 필자에게 새로운 의제 모색은 무거운 과제였다. 경제 위기가 찾아오면서 실업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모아졌고,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시민운동이 전개됐다. 경제 위기의 원인 중 하나인 재벌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다시 사회 의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총선 연대 활동과 2001년의 의약 분업을 의제로 삼은 활동이 마무리되면서 비슷한 질문들이 남았다. 그러나 총선 연대의 낙선 운동 같이 사회적 긴장을 가져 오는 의제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시민 단체들은 일종의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제기하는 이슈나 의제들이 사회적 긴장을 가져 오는 일들이 생겼다. 강의석이 제기했던 학원에서의 종교 자유 투쟁,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 거부 투쟁, 천성산 터널 문제에 대한 지율 스님의 단식,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새만금 간척 반대를 위한 삼보일배가 대표적이다. 이때 대부분의 시민 단체들은 사태를 이끌어가기 보다 조력자 역할에 머물렀다. 2002년에 미군 장갑차에 의해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에 항의한 촛불 시위도 어느 네티즌의 제안에서 시작했다.

자발적 모임들이 늘어나면서 운동 방식과 과정이 달라졌다. 개인의 가치 지향이 담긴 신념이 사회적 공감을 얻었고, 같은 지향을 가진 자발적 모임들이 활동하며 여론을 확산시켰다.

개인이 시작한 운동이지만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강의석의 투쟁은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에서 실시한 학내 종교 자유 실태 조사로 이어졌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이후에 전쟁 없는 세상같은 평화 운동 단체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 모임 등으로 발전했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삼보일배는 새만금 화해와 상생을 위한 국민회의로 이어졌다. 개인이 제기한 문제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며 사회 의제로 발전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조직으로 발전한 셈이다. 사회적 공감을 바탕으로 조직이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방식은 기존 단체가 성명을 내고 집회를 조직하는 방식의 대변하는 방식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신념을 가진 개인이 보여 주는 진정성에 사람들은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반대 운동 초기부터 민중 단체와 시민 단체가 참여한 연대 기구가 활동 중이었지만 기대만큼 관심을 모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에는 그의 어려움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바그다드 한복판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주던 한 활동가의 홈페이지가 상황을 역전시켰다.

일회적 사건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분명한 사회적 성과를 냈다. 2004년에 친일 인명사전 편찬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친일 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삭감되어 난관에 부딪쳤다는 사실이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아 시민 모금을 제안했고, 이를 오마이뉴스와 사전 편찬 책임자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진행하면서 순식간에 7억 원이라는 돈이 모였다. 이렇게 모은 지원금 덕분에 2009년에 친일 인명사전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오늘날 소셜 펀딩으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들은 시민운동의 대중적 토대가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줬지만 기존 시민 단체들은 여기에 쉽게 결합하지 못했다. 변화의 가운데에는 기존 시민 단체들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의 생태계가 있었고, 변화를 시작한 개인에게 연대 기구에 가입할 이유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이런 변화는 지역 사회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