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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운동의 자발적 모임들의 성장

 

 

 

2) 인터넷을 매개로 한 운동의 자발적 모임들의 성장

 

우리 사회에서 인터넷이 상업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이다. 다음(Daum)1995년에 창업했고, 이메일 돌풍을 몰고 온 한메일이 1997년부터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사회 운동 진영에서 인터넷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에 총선 연대 활동을 경험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96년 무렵 필자가 경실련에 있을 때 광통신선이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사무실에서 인터넷의 검색 기능을 이용하거나 이메일 계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그런 환경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었다. 2~3인이 컴퓨터 한 대를 공유했고 대부분이 문서 작업용으로 이용했다.

  필자에게 인터넷은 신세계였다. 겨우 내부를 설득해서 나우누리에 경실련의 CUG(Closed User Group)를 만들어 놓고 내부 부서와 지역 경실련들을 연결해서 전자적 소통에 막 익숙해졌던 참이었다. 다들 전자적 소통에 무관심했던 때라 홀로 당시 나우컴 대표이던 문용식 선배를 만나서 부탁하는 고군분투 끝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인터넷은 오죽했겠는가? 다행히도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점차 다들 익숙해졌고, 대문만 덜렁 있는 어설픈 경실련 홈페이지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도화되어 있는 참여 예산 제도의 시작이나 조세의 날납세자의 날로 바뀐 배경에는 경실련에서 시작한 시민 행동에서 발전된 예산 감시 운동이 있다. 예산 감시 운동은 당시 인터넷의 재미에 푹 빠져 있던 필자가 미국의 납세자 운동 사이트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그때부터 납세자 운동에 관심 있는 재정 분야의 학자들을 찾아 이런 운동을 해 보자며 제안했고, 경실련 내부에서도 납세자 운동 부서를 만들자며 설득을 거듭한 끝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설픈 과정이었다 싶지만, 나름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새로운 운동을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경험이 경실련을 나오고 함께하는 시민 행동을 창립하면서 개인 정보 보호 운동을 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인터넷을 기반에 두지 않은 운동은 정보에서 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근본적으로 시민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시민 단체들이 뒤늦게 인터넷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배경은 총선 연대 활동이었다. 경실련이 총선 연대보다 먼저 20001월 초에 낙천 대상을 발표했는데, 과거 같으면 명단이 궁금한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명단을 다시 찾아보거나 경실련에 연락해서 명단을 팩스로 받아 봐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경실련은 사람들에게 명단을 보내 주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실련은 이 명단을 몇 년 전에 만들어진 뒤로 조금씩 진화해 오고 있던 경실련 홈페이지에 게시하였고, 경실련 서버는 접속자들이 폭주하면서 여러 번 다운되었다. 명단이 퍼지는 속도도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메일로 명단을 주고받거나 각종 게시판에 명단이 게시됐다. 자기 지역의 낙천자 명단이 궁금했던 사람들의 접속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관련 정보도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대상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총선 연대의 낙선 대상자 명단도 비슷한 경로를 통해 확산되었다. 그때까지 홈페이지조차 제대로 만들어 놓고 있지 않았던 대부분의 시민 단체들은 이후 저마다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홈페이지가 없는 시민 단체가 절반에 가까웠다. 내부에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관리할 인력이 마땅치 않았고, 외부에 제작을 맡기려 해도 비용이 문제가 되었다.

  시민 단체들의 상황과 관계없이 시민들은 인터넷을 매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9년에 다음이 카페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다음 카페에 여러 모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시민 단체들이 인터넷을 통한 운동에 관심을 막 가졌을 무렵 시민들은 이미 인터넷 모임을 만들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사망 사건 당시 촛불 시위는 앙마라는 아이디를 가진 한 네티즌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카페나 게시판 등을 통해 두 여중생의 사망 사진이나 관련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 개정과 한국 정부와 미국 측의 대응에 분노하는 목소리들이 높아 가던 때이기도 했다. 그 이전부터 미군 부대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진보적 시민 단체들은 미군 부대 앞에서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시위를 하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인터넷을 매개로 해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새로운 현상을 만들 동력을 쌓아 가고 있었다. 앞서 인용한 시민 단체 총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이러한 단체들이 이미 1,000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필자가 관심을 가졌던 단체 중 하나가 자전거 동호회였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나 발바리라는 자전거 모임에는 상근자가 없었고, 회비도 없었고, 사무실도 없는 대신 카페에 가입한 회원들이 내부 논의를 통해 모임을 만들어 갔다. 네이버 카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회원 수가 50만 명을 넘는다. ‘발바리모임에서는 자전거 타는 행위를 잔차질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매월 셋째 주 토요일이 되면 광화문에 모여 떼거리 잔차질이라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전거가 환경오염으로 죽어 가고 있는 도시를 살리는 대안적인 녹색 교통임을 확신하며 자전거를 타지만, 자전거를 타고 나오신다면 당신이 누구라도 어떤 목적으로 타든지 상관없습니다. 자전거를 탄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함께 타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서울의 모든 잔차들이 모여 잔차 페스티벌이 펼쳐지는 게 발바리의 꿈입니다!

 

축제답게 우스꽝스럽더라도 최대한 잔차를 치장해서 나오면 더욱 즐겁겠네요. 우리는 자전거의 권리를 되찾는 구호로 치장할 것입니다. (자전거는 대안적 녹색 교통수단이다!, 자전거 전용 도로를 확대하라!)

 

 

잔차 페스티벌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 2005년 봄 광화문에 직접 나가 보았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구호를 붙인 채 서울 시내를 자전거로 달릴 뿐이었지만, 자전거 정책에 대한 어떤 집회나 시위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퍼포먼스였다.

 

인터넷을 매개로 만들어진 단체들은 2000년대 초반에 이미 1,000여 개에 달할 정도였고, 이런 자발적 모임들이 기존의 시민 단체와 상관없이 자신이 공감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시민 단체 혹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함께하는 시민 행동에서도 이런 모임들을 경험했다. 시민 행동을 돕던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모임인 번역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번세바)’은 시민 단체의 번역과 통역을 도와주던 자발적 모임이지만 상근자도 없었고, 사무실도 없이 그저 게시판 하나로 운영됐다. 이외에도 아파트 가격 내리기 시민 모임같은 소비자 운동형 단체 같이 다양한 모임들이 생겨났다.

  자발적인 모임들이 늘어나면서 대변형 운동이라 불렸던 시민운동의 전형적 행사들(공청회, 토론회 등)에 참여자들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대신 인터넷상에서 직접 말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굳이 시민 단체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줄어든 것이다. 이런 자발적 모임들이 어떻게 성장하여 서로 연결되는지는 2008년 촛불 시위에 가서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 [2월 4일 연재] 새롭게 성장하는 운동들: 3) 다양한 가치에 기반한 모임들의 성장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