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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책

책을 만드는 시간








드라마 좋아하시나요? 최근 <응답하라 1994>, 일명 응사응칠보다 더 재미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에 저도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응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다 보니, 앞선 드라마와 비교하면서 관전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응사시절 이야기가 더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좀 더 비슷한 나이대로 접근했기 때문이겠지요.


 

1994년은 제게도 의미있는 해입니다. 출판계에 처음 입문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임고를 보고 싶지 않았던 저는, 교육과 연관된 곳에서 일하고 싶었고, 같은 곳에 두 번 입사원서를 넣고서야 간신히 출판계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느 책엔가 제 소개글로도 썼었듯이 하고픈 일이 있으면 알아서 몸이 재빠르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던 것이지요.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니, 할머니께서는 제게 종종 공장 잘 다녀와라’, ‘공장 잘 다니고 있냐라고 하셨습니다. 하긴, 출판업이 제조업으로 분류되어 있으니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또 다른 분들은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니, ‘디자인을 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저자(또는 작가)가 글을 써오면 그것을 그대로 책의 형태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분은 드물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도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원고 투고를 하신 분들 중 대부분은 원고 탈고 후로부터 1-2개월 안으로 책이 출간되기를 바라는 분이 많습니다. 처음 책을 출간하는 저자분의 경우에는 처음 정한 일정에서 조금이라도 늦추어지면 무척 화를 내는 분들도 있고, 또 몇 번 책을 출간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무리한 출간 일정을 요청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책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딱히 없습니다. 책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저는 텍스트만 있는 300쪽 이내의 책일 경우 최소 3개월을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초고 상태의 원고가 아니라 완고 상태로 들어온 원고를 토대로 했을 때를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계약이 끝나고 원고에 대해 저자와 편집자가 몇 번 의견을 주고받고 나서 최종 원고를 언제까지 탈고할 것인지 편집 과정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가 끝난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그럼 그동안 진행되는 편집 과정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제일 먼저 해당 책의 원고를 읽고 기획안을 작성해 어떠한 책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뼈대를 세우고 예상 매출과 더불어 출간 일정을 확정합니다. 이 기획안이 통과되면 원고 교정교열을 통해 틀린 맞춤법은 없는지, 비문은 없는지, 문맥에서 이야기가 어긋나는 지점은 없는지를 잡아내고 수정하기를 최소 세 번 진행합니다. 기획 단계에 확정된 판형에 맞추어 디자이너와 상의해서 본문 레이아웃을 정하고, 이미지컷이 들어갈 경우 디자이너가 편집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준비합니다. 이때 이미지를 찾고 최종 선택하는 것 모두를 편집자가 직접 하기도 합니다.

책의 제목을 정하고 표지 앞뒤에 들어갈 글들을 정리해서 디자이너에게 의뢰를 하고, 앞뒤 부속물로 들어갈 요소들, 예를 들어 저자의 글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등을 점검하고 면수를 확정합니다. 감수 또는 추천사를 받아야 할 경우에는 누구에게 어떻게 의뢰할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예상제작비를 뽑아보고 책값을 정하고, ISBNCIP를 점검한 후 제작 준비를 합니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경우는 편집자가 직접 제작 발주서를 쓰고 제작처와도 논의를 해야 합니다. 책이 나오기 전에는 마케팅팀과 홍보 방안을 논의하고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를 작성합니다. 책이 나오면 언론사로 신간을 홍보하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을 납본합니다.

이 모든 과정마다 해당 책의 저자, 원고 교정교열 담당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의 스태프들과 소통하고 논의하고 확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외에도 참으로 자잘한 일들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동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원고 투고하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원고 제출한 때로부터 1-2개월 안에 책이 출간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조심스럽게 거두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책은 아무 때나 내면 되는 것일까요? 편집자와 마케터는 가장 적정한 시기 책이 출간되어 이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어떤 책의 경우에는 출간 시기라는 것이 확연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625일 가까운 시일에 나오면 좋겠고, 크리스마스 시즌과 관련한 책은 그 즈음에 출간하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인간의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던가요. 일정한 프로세스를 거치는 일임에도 책은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어서 어디선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거친 책일수록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를 숙성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고기도 도축하고 나서 숙성 기간이 필요하듯이, 아무리 급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책일지라도 숙성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저 또한 해당 원고에 대해 친숙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간혹 마감 기간을 좀 더 단축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원고가 무르익어 가는 시간인 동시에 편집자가 원고와 저자와 더불어 을 맞추어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 시간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책이 출간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당연히 다른 것이겠고요.

 

작년 5,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친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2>가 바로 그 책입니다. 20084, 처음 이 책의 집필진 선생님들을 뵈었으니, 4년 넘게 걸려 책이 출간된 것이지요. 그동안 원고 집필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논의해왔지만, 제대로 된 숙성의 시간을 보낸 것은 2011년 여름 이후부터였습니다. 두 권에 해당하는 4천 매가 넘는 원고를 책임편집장 한 분과 더불어 씨름하듯 진행을 했는데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쪽 저자와도 소통해야만 해서 참으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20125월 말 출간일로부터 약 20일을 남겨놓고, 막판 작업을 도와줄 편집자들을 불러 모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정사정한 덕분에 20년 가까운 경력의 편집자 네 분을 내부에서 2, 바깥에서 2인을 섭외해 원고 진행 서포트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으로 재미난 경험이었는데요, 두 명의 편집자가 진행해오면서 겪은 숙성의 시간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편집 진행 과정을 새로 투입된 4인의 편집자가 일사천리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제각기 할 일을 해나가는 모습에서, 선수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던 것이 갑자기 대동 한마당 축제를 여는 일처럼 여겨지게 된 그때의 느낌은, 지금도 제가 힘들 때마다 종종 생각나면서 힘을 주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의 실무 담당자까지 이 일에 투입되어 다양한 도움을 주었는데요, 그때의 진한 전우애덕분인지, 지금도 인연을 맺고 함께 휴머니스트 역사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보면, 책을 만드는 시간은 편집자가 저자와 원고와 거리감을 줄이며 친분을 쌓아 책을 잘 만들 수 있게 만드는 기간이며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편집자들끼리 또는 책을 만드는 여러 스태프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관계를 맺어나가며 충족감을 채워나가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따뜻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이니 당연히 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것이겠지요.

 

한 권 한 권 모두 따뜻한 출산 과정을 거치며 사랑받고 태어난 책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분들 또한 부디 이 모든 책들을 사랑으로 대해주기를 바랍니다.

 

(벗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