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게임, 그리고 퍼거슨 옹
저도 한동안 악마의 게임에 빠져든 일이 있답니다. 풋볼매니저라는 이 시리즈는 축구감독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폐인들을 양산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는 ‘이혼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은 게임입니다.
선수들을 직접 조작하여 승부를 하는 스포츠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감독 역할을 하는 게임이다 보니, 해야 할 일이 태산입니다. 구단의 경영에도 참여하여야 하고, 선수들의 영입과 방출은 물론 전략을 짜고, 훈련을 시키고, 경기를 지휘하며 지속적으로 선수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상대 감독, 우리 선수 사기, 상대 팀 선수의 사기 등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수치와 텍스트들로 가득 채워진 모니터를 노려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 저를 보면 아내는 혀를 차며 한마디씩 했지요.
“공부해? 무슨 게임이 그래? 일을 하는 게 더 재밌겠다.”
주말 내내 꼼작 안하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자면 한 마디 더 들어옵니다.
“그걸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축구 감독될껴?”
참다 못해 던진 한 마디인 줄 알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멈출 수는 없었지요.
“엉, 나중에 커서 축구 감독될 거야.”
…몇 해만 더 크면 쉰인데…
어쨌든, 이 게임을 경험한 후로, 축구 경기를 볼 때면 감독의 경기 운영이나 전략 같은 것에 눈길이 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감독 자신의 이야기 자체에도 관심이 가더군요. 세계적인 명문 구단의 유수한 감독들이 있지만 언제나 눈길을 끈 사람은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감독 자리에서 은퇴한 알렉스 퍼거슨이었습니다. 1992년 영국프리미어리그(EPL)가 정식 출범한 이후 20번의 시즌 중 13번을 우승한 감독, 총 38개의 주요대회 우승컵을 맨유에 선사한 이 사람은 명실상부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지도자로 공인되고 있으니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연일 그에 관한 기사가 뜨는 것은 그가 이룬 성공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거칠 것 없는 입담과 특유의 카리스마야말로 축구 팬들이 사랑하는 퍼거슨의 모습이니까요.
퍼거슨은 인터뷰를 능구렁이처럼 이용하는 감독이었습니다. 경기를 앞 둔 적장들의 도발에는 해학적이면서 단호한 대응으로 한 수 위의 심리전을 보여 주었고, 경기 중 자신의 선수들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판단하면 경기장에서는 물론 경기가 끝난 후에도 거칠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이런 일로 여러 차례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굽힘이 없었지요. 오히려 심판들은 퍼거슨에 대한 존경심과 공포심이 뒤섞인 상태에서 ‘퍼기 타임’이라는 독특한 시간대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퍼기 타임은 맨유에 유리한 추가 시간 판정을 뜻하는 말로 실제 경기 집계를 해 보면 맨유가 동점 상황이거나 뒤지고 있을 때 일반적인 추가 시간에 비해 79초 가량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고 합니다)
퍼거슨은 ‘헤어드라이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전반전이 끝난 라커룸, 그는 자신이 제시한 전술이나 방침을 수행하지 않으려는 선수의 면전에 가서 그 선수의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괴성을 지르고 고함을 치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화를 내며 걷어찬 운동화가 베컴의 얼굴에 맞아, 모델로서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베컴의 얼굴에 상처가 난 일이 있었답니다. 이 일 때문인지 베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 퍼거슨을 떠났습니다. 퍼거슨은 또 전설적 골키퍼 슈마이켈과 몸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퍼거슨은 자신보다 비싼 몸값의 스포츠 스타들까지 지휘해야 했으며, 30명의 백만장자들을 통제해야 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도 이 사실을 잘 알았겠지요. 베컴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이런 일들로 구단을 떠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퍼거슨은 헤어 드라이어 처방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기적인 성과와 긴박감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프로 축구계에서도 언제나 승리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위대한 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팀', '우리의 팀'이 가야할 길을 막는 선수가 있다면 그가 지구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감독의 통제력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헤어 드라이어로서의 면모만 본다면 그는 괴팍한 성공주의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맨유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평소에 온화한 웃음을 띠는 친절한 사내였다고 합니다. 선수 기용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을 따뜻하게 달래 주기도 하고, 자신의 선수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을 때마다 편안한 언어로 여론의 이해를 구하며 방패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선수들이 그에게 바치는 헌사와 회고담은 그의 냉철함과 따뜻한 인간의 면모를 골고루 비추고 있네요.
퍼기의 아이들
유소년 시절부터 퍼거슨의 지도로 성장한
지구방위대급 선수들의 젊은 모습
왼쪽으로부터 첫번째, 퍼거슨
두번째 왼발의 달인, 긱스
네번째 최고의 축구 스타, 베컴
다섯번째, 맨유의 캡틴이자 최고의 풀백,
게리 네빌
여섯번째, 게리 네빌의 동생 필 네빌
일곱번째,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들필더,
스콜스
그의 곁을 떠난 선수들도 그의 곁에 남은
선수들도 그에 대한 찬사가 이어집니다.
인터뷰의 달인 퍼거슨이 마지막으로 경기를 마치자 많은 기자들이 마이크를 뻗었겠지요. 퍼거슨은 인터뷰를 사양하며 단 세 단어만으로 은퇴 심경을 요약했답니다.
“emotional, very emotional." 경기장을 떠나는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까요?
조선소 노동자 출신의 특출날 것 없던 2군 축구 선수, 그가 축구 하나로 기사 작위를 받고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언니를 잃고 외로워하는 아내의 옆자리를 지켜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채 은퇴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엔딩의 이유조차 멋드러집니다!
이 입지전적인 73세 인사의 퇴장을 보며 저 또한 꿈을 꾸어 봅니다.
늙어도 늙지 않는 불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프로 구단의 감독이야 될 수 없을지언정, 멋진 노년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면ㅡ 멋진 노인이 된다는 거....참, 어려운 일인듯요.
초식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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