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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너와 나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공감(共感)



2011년 지리산을 종주할 때의 일이다. 텐트도 없이 오직 침낭 하나에 의지해 한데서 잠을 자는 이른바 ‘비박’을 하게 되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비박을 하기로 하고 산행에 나선 길이라 산장 대피소 근처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젖어 있는 바닥에 비닐을 깔고 침낭 속에 들어가 다시 침낭 위에 비닐을 덮고 잠들어야 했다. 9월말, 초가을이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뼛속으로 스미는 듯했다.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야영의 맛은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껴안는 데 있었지 편함을 구하는 데 있지 않았다. 빗속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1,000미터 이상의 고지를 오르고, 구부구불한 산길을 걷는 일도 힘에 부쳤지만 쌀을 씻고 안쳐 밥을 해먹는 일도 고역이었고, 잠자리도 편하지 못해 이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몸이 고되면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지는 법, 한발한발 발을 내딛는 일에 집중하다보면 불편한 침낭 속에서도 깊고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새벽 두시쯤 되었을까. 축축한 기운에 잠이 깨어, 계속 비가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침낭의 자크를 열었을 때였다. 숨이 턱 막혔다. 어마어마한 별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늘의 반이 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별들이 한 사내가 피곤에 지쳐 잠든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지리산 근처로 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새카만 밤하늘, 거대한 무리를 지어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수억 광년을 고단하게 달려와 비로소 내 눈에 당도했을 별의 여정을 생각하니 지리산 삼박사일의 여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광대무변의 우주였다. 나는 그 우주의 한 귀퉁이에 있는 한 개의 별, 그 속의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나의 배낭도, 내가 걸어온 길도, 그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는 먼지 같은 것이었다. 이 거대한 우주를 심장과 폐를 가진 한 마리의 포유류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급기야 내 눈에서는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지리산의 밤하늘을 수놓던 별빛이 내 눈 속으로 흘러들어와 내 눈에서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흘려보냈다. 눈물이었다.

뒷날 아침을 먹으며 일행들에게 어젯밤에 거대한 별들의 무리를 보았다고 했더니 일행 중의 한 분도 당신도 새벽의 하늘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런 장관을 보기는 처음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밤하늘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남자가 감정이 뭐 그리 헤프냐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하루의 피곤을 풀기 위해 술을 마실 때, 이성의 통제가 느슨해졌는지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더니, 새벽의 하늘을 보았다는 일행 또한 자신도 그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눈물을 매개로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월의 환희>라는 시에서 시인 김현승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밝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밝음 따로, 어둠 따로가 아니라 어둠과 밝음은 서로를 껴안고 있는 존재다. 밤하늘은 바로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말해준다. 밤하늘에서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 삶에서도 슬픔과 기쁨은 둘이 아니다. 슬픔은 기쁨을 껴안고 있고, 기쁨은 슬픔을 껴안고 있다.

 

혼자서 남편도 없이 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어머니가 보여주는 눈물, 그것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 눈물은 슬픔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하다. 눈물은 슬픔을 말하는 기호이지만 그 어머니에게서의 눈물은 슬픔만을 말하지 않는다. 힘들게 자식을 키운 시간을 생각하면 서러움이 밀려온다. 그 서러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라면 슬픔의 눈물이겠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주어서 고맙다는 고마움의 눈물이요, 기쁨의 눈물일 수 있다.

 

바로 그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면서 아들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마음도 아들에게 흘러들어간다. 마음과 마음이 육체라는 경계를 넘어 흘러가는 것, 그것이 공감(共感)이다. 문자 그대로 공감은, 같이[共], 느낌[感]이다. 지리산의 밤하늘에서 네가 느꼈던 느낌을 나의 일행과 공유하듯, 졸업식장에서 어머니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듯,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공감이다.

 

공감은 마음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지만 마음으로 연결되는 느낌을 가질 때 우리는 마치 남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 일체감을 갖는다. 붉은 악마가 승리했을 때,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실제로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걸기도 하고 심지어는 포옹을 하기도 한다. 공감은 너와 나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고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