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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냉정한 육체의 눈, 왜곡을 일삼는 마음의 눈




냉정한 육체의 눈, 왜곡을 일삼는 마음의 눈


김홍도의 그림 <서당>을 가만 들여다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회초리를 놓아두고 앞쪽에서 훌쩍거리는 학동을 야단치는 훈장님의 모습이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친근하기까지 하다. 훈장님의 얼굴에서는 우는 녀석이 안 되었다는 연민의 마음도 읽을 수 있고, 너무 호되게 혼찌검을 낸 것은 아닌가, 하는 훈장님의 학동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벌을 받은 학동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은 어떤가. 연민과 동정은 없다. 고것 참 쌤통이다, 하는 표정이다. 남들이 숙제할 때, 혼자만 열심히 놀더니 어디 한 번 호되게 당해봐라, 하는 표정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훈장님의 덩치를 보면 앞에서 찔끔거리는 학동의 세 배쯤 크기로 그려졌다. 반면에 찔끔거리는 아이는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더구나 훈장은 그림을 그린 사람의 눈에서 가장 먼 곳에 있으니 원근법의 이론에 따르면 다소 작게 그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동의 세 배쯤의 크기로 그려졌으니 지나치게 과장되게 부풀려 그려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 그림에서 이런 과장이 발생했을까.

 

한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에서는 육체의 눈이 작동할까, 마음의 눈이 작동할까. 김홍도의 <서당> 그림으로 보면 마음의 눈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서당을 다녔던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속에 훈장님은 권위가 있는 존재다. 결코 왜소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고 육체의 눈이 있다. 마음이 개입하지 않은, 기계적인 육체의 눈은 훈장님의 키가 160센티미터에 못 미친다고 냉정하게 판단할지 몰라도 마음의 눈은 170센티미터 이상이라고 로 볼 수도 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하신 존재, 큰 인격을 가진 존재라면 결코 작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방 세 칸짜리 집도 대궐처럼 크게 보인다. 마음의 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궐 같은 집에 살던 사람들은 방 세 칸짜리 집이 형편없이 좁게 보일 것이다. 역시 마음의 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이 작동하면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크게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아버지가 작게 보인다. 아버지의 키는 변함이 없지만 아버지를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책, 『설득의 심리학』이란 책이 소개하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온 한 방문객이 호주 대학의 다섯 학급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에서의 그의 신분은 이 다섯 학급에 각각 다르게 소개된다. 첫 번째 반에서는 단순한 학생으로 소개되었고, 두 번째 반에서는 대학원생으로 소개되었고, 세 번째 반에서는 시간강사로 소개되었고, 네 번째 반에서는 전임강사로 소개되었고, 다섯 번째 반에서는 교수로 소개되었다.

 

그 방문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학생들에게 그의 키가 얼마쯤 될 것인가를 적어내라고 하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방문객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그의 키에 대한 예상치가 평균 1.3센티씩 증가하였음이 발견되었다. 똑같은 방문객이라 할지라도 그를 학생으로 소개시켰을 때보다, 교수로 소개시켰을 때 그의 키를 약 5센티미터 큰 것으로 호주 대학의 학생들이 인식하였다는 말이다.

 

교수는 학생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교수라고 해서 학생보다 키가 클 수는 없다. 그러나 호주 대학의 학생들은 “교수는 학생보다 중요한 존재이니까 마땅히 그는 학생보다 가치가 ‘큰’ 존재임이 틀림이 없어. 그러니까 키도 크겠지.”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똑같은 크기의 여러 가지 동전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높은 금액의 동전이 더 크다고 인식한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기계의 눈은 냉정하게 실제의 크기를 잴지 몰라도 인간이 가진 마음의 눈은 실제 이상의 것을 본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훈장님이 크게 그려지고 학동의 모습이 작게 그려진 것은 김홍도가 마음의 눈으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부모님은 자식을 보고, 한 남자는 한 여자를 본다. 그의 눈 속에는 한 아름다운 사람이 서 있다.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육체의 눈, 기계의 눈은 세상을 냉정하게 보지만 마음의 눈은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실제와 다르게 보는 왜곡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왜곡으로 인해 세상은 살 만해진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름답다고 보는 사람, 그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