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나의 감각만이 절대적인가




'SF 영화로 보는 철학적 물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용헌의 책,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는 ‘있음’과 ‘없음’, 인식과 존재의 문제를 일관되게 조명하고 있다.

 

혈동물의 피를 먹고사는 진드기가 온혈동물을 감지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피부의 지각세포다. 그 세포는 포유동물의 몸에서 나는 탄소 냄새에만 반응한다. 물론 식물의 냄새, 빗물 소리, 바람 소리, 새의 노랫소리 등등 진드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다양하다. 그러나 진드기에는 이런 다양한 세계는 의미가 없다. 포유동물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체온과 피부의 접촉 자극이라는 세 가지만이 진드기에게 의미가 있다. 꽃의 향기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어도 진드기에게는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진드기와 인간이 객관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쓴 야곱 폰 웩스쿨은 객관적 세계를 의미하는 ‘벨트(Welt)’와 구분지어서 각각의 동물이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를 ‘움벨트(Umwelt)’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감각한 세계를 객관적 세계, 즉 ‘벨트(Welt)’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각의 세계, 즉 ‘움벨트(Umwelt)’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인간에게는 초음파가 없고, 박쥐에게는 초음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초음파를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만 초음파는 존재하고, 초음파를 느낄 수 없는 존재에게 초음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초음파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벨트(Welt)’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동물에게만 존재하는 ‘움벨트(Umwelt)’라는 것이다.

 

  저자는 ‘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라는 책이 가지는 문제의식과 견해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옥사이드 팽(Oxide Pang) 감독의 홍콩영화 <디아이 The Eye>(2002)의 주인공의 사례를 들어, 시지각을 갖추는 것이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정상적인 눈이 있어도 인간은 사물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윙카 문은 두 살 때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스무 살 때 각막이식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붕대를 푼 날 가장 먼저 본 건 검은 그림자일 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윙카 문이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 혹은 ‘가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력을 회복한 윙카 문이나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나 시지각은 멀쩡하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 기관이 멀쩡하다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시력을 잃은 윙카 문의 세계에서 시각은 ‘없는’ 감각이다. 이때 윙카 문의 움벨트를 구축하는 것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이다. 그 움벨트의 세계 속에서 윙카 문은 큰 문제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눈을 뜨자 세상은 달라졌다. 시각의 세계가 그가 지금까지 구축한 움벨트의 세계를 흠집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윙카 문은 혼란스럽다. (시각을 되찾은 자의 혼란을 옥사이드 팽 감독은 스릴러 장르라는 영화적 관습으로 잘 녹여내고 있다.) 혼란스러운 윙카 문은 결국 다시 실명(失明)을 택한다. 눈을 뜬 세계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눈먼 세계’가 안락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세로줄 무늬의 고양이가 탁자 위에서 바닥의 가로줄 무늬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과 시각을 되찾은 윙카 문의 공포감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물은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우리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물은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감각만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각만을 절대화하여 나만의 움벨트만이 이 세계의 실상과 일치한다고 우길 때,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나에게 뜨겁지 않은 것이 남에게는 뜨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