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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최승아|오, 이런! 이란!

우리 술 한 잔 하자 언젠가는!

  

 

 

 

저것 봐. 옛날에는 다 마셨다니까.”

 

선배는 손가락으로 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스파헌의 유명관광지 체헬소툰 궁전 안, 한 벽화 그림을 마주하고 있었다.

 

선배는 직장 문제 때문에 10년 가까이 이스파헌에 살고 있었다. 그가 여태껏 족히 열 번은 넘게 봤을 이 그림을 두고 한 말은 바로 현 금주 정책은 전통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것. 거대한 스크린처럼 펼쳐진 아치형 벽화 속 연회 장면엔 녹색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허리를 숙이며 콧수염 난 남자에게 붉은 술이 담긴 술잔을 건네주고 있었다.

 

이란에 오기 일주일 전까지 나는 한 대학 근처에 살았다. 집 주변엔 밤이 되면 노란 등이 켜지고 발그레한 얼굴들과 왁자지껄한 소리가 뒤섞여 흘렀다. 한마디로 술집으로 가득한 주림(酒林)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 일주일 뒤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이란 거리 어디에도 술은 없었다. 오로지 술과 비슷한 무알콜 맥주만 있을 뿐.

 

즐겨먹던 네덜란드산 바바리아 맥주는 겉모습이 알콜 맥주와 똑같았다. 그러나 녹색 캔 위에 보란 듯이 적힌 글자는 ‘ALC 0.0%’. 사과, 레몬, 복숭아 등 맛도 다양하고 까슬까슬한 탄산도 입 안 가득 느껴졌지만, 허전했다. 무알콜 맥주는 또 하나의 달디 단 탄산음료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금주국가인 이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 또한 의도치 않게 건강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맛있는 것 먹기, 수다 혹은 충분한 수면 등,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자 금주 국가에 살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슬슬 금단 증상도 나타났다. 가끔 한국 사람들에게 술을 얻었다 치면 한 방울 한 방울 아껴 마셨고 한국드라마를 볼 땐 유독 포장마차 신이 눈에 아른거렸다. 서로를 마주보며 투명한 술잔을 부딪치고 !’ 소리와 함께 꿀꺽 술을 넘기는일 조차 당시 내겐 금기였으니 말이다.

 

 

체헬소툰 궁전의 벽화. 여인이 술잔을 권하고 있다.

 

 

이란에서 즐겨 마시던 무알콜 맥주.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무알콜 맥주를 자주 볼 수 있다.

 

 

술을 향한 갈망이 포도알처럼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 드디어 포도주한 병이 손안에 들어왔다. 때는 늦은 봄날이었다.

 

,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술이야?”

 

가는 목과 두툼한 하체. 와인병의 곡선은 매끈하고 고혹적이었다. 이 와인은 그냥 와인이 아니었다. 와인을 구해준 지인에게 따르면 밀수입하는 술(맥주, 보드카, 양주) 중 와인은 유독 구하기 힘든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와인 오프너가 없음을 깨달았다.

 

3명이 와인 병을 매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주인아저씨께 오프너를 빌리는 건 어때?” 주인집엔 왠지 와인 따개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국 1층 주인집 문 앞까진 가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술이 금지된 이슬람 국가에서 한밤중에 와인따개를 구하러 주인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럴 수는 없었다. 별다른 묘책이 없었지만, 와인을 맛보고 싶은 갈망은 점점 코르크 마개처럼 단단해졌다. 낙담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벽난로였다.

 

! 쨍그랑!” 조용한 밤,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우리 집, 아니 조르단 거리의 조용한 밤공기를 갈랐다. 벽난로에 와인병을 내리친 것이다. 손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고 바닥에 떨어진 와인병목에서 붉은 물이 뚝뚝 흘렀다. 아랑곳 않고 절반이 날아간 와인병에서 붉은 와인을 콸콸 따라 주전자에 담았다. 그날 밤, 우리는 유리조각이 씹힐지도 모를 붉은 와인을 아주 달콤하게 마셨다. 내 생애 가장 위험하고도 달콤한 와인이었다.

 

 

 

술은 이슬람 혁명이 성공으로 끝난 뒤부터 금지됐다. 이란 거리에서 술이 사라진 지 채 40년이 되지 않은 셈이다. 금요 벼룩시장에서 구한 1970년대 잡지 <여성세계>에는 원색으로 된 보드카 광고가 실려 있었는데 과감하고 섹시했다. 하늘 끝까지 올린 풍성한 속눈썹,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의 뇌쇄적인 이란 여성이 병에서 흘러나오는 투명한 보드카 물줄기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가 짐작이 갔다.

 

언젠가 회사의 관리원 아저씨에게 술 얘기를 물은 적이 있다.

 

아저씨. 아저씨도 술 마시죠?”

 

아니요. 저는 안 마셔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수북한 콧수염이 내 볼에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집에서는 가끔 마셔요. 있잖아요. 옛날에는 구멍가게에서도 다 술을 팔았어요.”

 

이슬람은 왜 술을 금지하는 걸까? 간단하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술에 관한 인간의 무절제함을 지적한다. 설사 치료 목적으로 술을 마신다 한들 인간은 늘 한두 잔에서 그치지 못하고 결국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만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술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이유다. 무함마드는 말했다. “한 통의 술이 취하게 한다면 그것의 한 모금도 하람(금지된 행위)입니다.” 혁명 전 이슬람은 이란에서 권위 있는 종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종교가 국가의 한가운데로 쏙 들어와 버린 것. 이란에서 술이 금지 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믿는 자들아, 음주와 도박과 우상숭배와 점술은 사탄이 행하는 더러운 일이니 그것들을 삼가라.(코란 590)” 술에 관한 신의 말씀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코란과 함께 이란사람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또 한 권의 책이 있으니 바로 허페즈의 시집이다. 그런데 허페즈 시집을 보다보면 술에 대한 구절이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술과 술잔에 대한 생각보다 더 즐거운 게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나오는 구절도 있다. “아침이 피어오르고 구름이 장막을 치나니, 친구여! 아침 술, 해장술 가져오려무나.” 해장술이라니! 종교에 관한 과감한 발언도 있다. “난 술집에서 신()을 보며, 술집에 머리를 숙이네. 성직자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머리를 벽에 박는 격이도다.” 이란 가정집에 나란히 전시된 이 두 책은 술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술에 관한 한, 경전과 불온서적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

 

 

 

지금은 이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주류 광고. 1970년대 잡지 <여성 세계>에 수록된 광고의 한 장면이다.

 

 

허페즈의 싯구에도 드러나듯 페르시아는 원래 포도주가 흘러넘치는 땅이었다. 페르시아 신화에는 와인에 관한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페르시아의 잠시드 왕은 포도를 너무 좋아하여 포도를 늘 항아리에 보관해 두고 조금씩 꺼내먹곤 했다. 어느 날 그는 포도가 상한 걸 발견하고 먹으면 탈이 날 걸 염려해 항아리에 독약이라고 써 붙여 두었다. 얼마 뒤 두통에 시달리던 하렘의 한 여인이 이 항아리를 발견하곤 이런 고통 속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상한 포도물을 들이켰다. 그녀는 죽기는커녕 잔뜩 취해 쓰러져 잠을 자고나니 두통이 씻은 듯 나았다. 그리고 그 여인은 썩은 포도물의 효험을 잠시드 왕에게 고했다. 이를 계기로 페르시아에서 와인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건, 다른 중동지역 신화 속 이를테면 성경 속 최초의 와인 시음자 노아의 얘기, 수메르 신화 속 와인 얘기를 따져 봐도 최초의 와인 생산지는 현재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 주변으로 추측된다는 사실이다. 허페즈가 포도주를 마시며 시를 썼던 쉬러즈도 바로 자그로스 산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쉬러즈 와인은 이란의 쉬러즈와 관련이 없다). 덧붙여 에탄올, 즉 술의 주성분인 에틸알코올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바로 페르시아 화학자 알 라지(Al Razi)라고 한다. 고로 지금 이란의 모습은 알코올과 와인을 전 세계에 선사한 땅에서 오히려 술을 금지하고 있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인 셈.

 

 

 

이란에서 음주가 금지된 지는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술이 존재했을 때부터의 시간에 비하면, 사실 이 시간은 한 방울도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시간이다. 국가 정책이 단번에 뒤집힌다 한들 문화와 습관이 한 번에 바뀔 리 없다. 더불어 금기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다.

 

깜깜한 밤, 털레쉬의 터헤레 둘째 언니 마흐텁 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승아, 이리 좀 와봐요.”

 

마흐텁 남편이자 터헤레 형부인 코스로 씨가 부엌에서 갑자기 나를 불렀다. 쌍커풀 짙은 그의 커다란 두 눈이 들떠 보였다. “, 술이네요.” 그가 냉장고를 열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양주병이었는데, 코스로씨는 와인이라 강조했다. 마흐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릴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때 우린 들떠 있었다. 아니, 코스로 씨가 제일 들떠 있었다.

 

. 이거 정말 와인 맞아요?”

 

그렇고말고요.”

 

좁고 긴 양주잔에 따라 마셔보니 달콤한 포도맛이 와인과 비슷했다. 한잔 마시고 고개를 드니, 사람들 눈이 다 나를 향해 있지 뭔가. 터헤레는 흐뭇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고, 혈기왕성한 두 조카들은 더 마시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코스로 씨는 내가 소믈리에라도 되는 냥, 긴장된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현재 이란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몰래 사서 먹거나 아니면 몰래 만들어서 먹거나. 이란 서쪽 쿠르드지역을 통해 이라크에서 밀수입된 술(맥주, 보드카, 와인 등)은 지금도 이란 거리 어딘가에서 은밀하게 흐르며 목마른 이란사람들의 목을 적셔주고 있다. 밀수행위는 매질, 벌금 등 대가가 크지만, 탄탄한 소비자층과 짭짤한 수입은 마르지 않는 밀수 행위의 연료인 모양이다. 내가 가끔 마셨던 보드카 앱솔루트(ABSOLUTE)와 덴마크 산 투보그(TURBORG) 맥주도 다 이런 어둠의 경로를 거쳐 수입된 것들. 가만 보면 이란인들은 술을 구하는 은밀한 경로를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밀수된 술은 가격이 비싼 터라 집에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홈메이드 술은 아락()’이란 말에 사기()’를 붙여 아락 사기(개같은 술)’라고 하는데,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다. 집에서 정성껏 만들면 모르지만 함부로 만들면 하렘 여인이 원했던 독약이 되는 건 시간문제. 얼마 전 이란에선 20대 젊은이들이 공업용 알코올과 에너지 음료를 섞어 만든 술을 마시고 죽거나 실명하는 사고가 벌어져 크게 이슈화되었다. 순수함과 정결함을 목적으로 거리에서 사라진 술이 때론 음지에서 오히려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코스로 씨가 애써 구해준 술을 단 세 잔밖에 마시지 못했다. 그의 커다란 눈에 실망감이 가득했지만 나는 더 이상 마실 수 없었다. 혼자 술을 마셔야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열네 개의 눈앞에서. 달큼한 술맛은 점점 밍밍해졌고 난 무척이나 심심했다.

 

한국드라마를 봤을 때 (많은 음주장면 중) 유독 포장마차 신이 눈에 들어온 건 술의 맛보다 술자리의 맛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술잔이 오갈수록 발그레해지는 얼굴, 촉촉해지는 눈빛. 단단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이야기가 술처럼 흘러넘치는 시간들. 내가 그리웠던 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카이얌은 내가 술을 왜 좋아하는지를 그의 시()속에서 이렇게 멋지게 표현해 주었다. “포도주는 최고의 연금술사, 잠깐 사이 납덩이 인생을 황금으로 바꾸누나.”

 

가끔씩 친구들을 보면서 상상하곤 했다. 친구들과 술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카펫 깔린 넓은 방안에 모여 앉아 함께 술을 마시는 상상을 해본다. 와인, 보드카, 맥주 등 다채로운 술들이 카펫 위를 오가고, 곧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하겠지. 술 한 방울 먹어 본 적 없다던 치만은 어떻게 될까? 착한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터헤레에게 그간의 불만을 속사포처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터헤레는? 그녀는 일전에 맥주를 마시고 밤새도록 춤을 췄다고 했다. 아마 목소리는 두 배로 커지고, 날 두 배로 세게 껴안지 않을까. 정치적인 친구 바허르는 거품 물고 조국의 현실에 대해 연설을 할까? 눈물 많은 미나는 지나간 사랑 얘기를 하며 꺼이꺼이 울지도 모른다.

 

베일 벗은 친구들의 모습은 실컷 봤지만, 베일 벗은 마음들을 많이 만나진 못했다. 마음의 베일을 벗기는 덴 사실 술만 한 게 없는데, 그걸 못 해봤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날이 올까? 어렵지만 아주 불가능한건 아니다. 그래. 얘들아, 술 한 잔 하자! 언젠가는!

 

 

 

 

 

최승아입니다. 서툴고 구멍도 많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을 내어 용기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원고를 부여잡고 절망에 빠지다가도, 리플 하나가 제게 빛이 됐습니다. 땀을 줄줄 흘리며 글 쓰던 여름이 지나고 이젠 선선한 가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열 개의 글로 비쳐진 이란은 어떤 모습일까요? 궁금합니다. 나머지 이야기를 채운 튼튼한 책으로 곧 만나 뵙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