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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최승아|오, 이런! 이란!

세헤라자데가 이야기꾼이 된 이유

 

 

 

난 테헤란 대학 맞은 편 거리에서 입을 헤 벌리며 서 있었다.

 

, 책 진짜 많다.”

 

테헤란 대학 맞은편, 도로를 따라 서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 거리는 세계 최대 서점 거리 중 하나라고 했다. 프랑스에 오데옹 헌책방 거리가, 일본에 간다 거리가 있다면, 이란엔 이곳 테헤란대학 서점 거리가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한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의 작가 아자르 나피시는 이 거리를 분홍빛으로 회상했다. 그녀는 이 거리를 걸으며 이 책방 저 책방을 돌아다니다가 영국의 무명작가 윌리엄 그린을 아는 책방 주인이나 손님을 발견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책도 책방도 많으니 보물 같은 책들이 숨어 있을 수밖에. 테헤란에서 유학하던 선배가 교수님께 희귀서적을 내밀며 이 서점 거리에서 겨우 찾아낸 책이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명실상부 이란을 대표하는 책의 거리지만 책을 쏙 빼면 그다지 멋진 거리는 아니다. 점포 같은 작은 서점이 죽 늘어서 있어 마치 서점 판 용산 전자상가를 보는 듯하다. 그래도 테헤란 대학을 마주한 채 매일같이 지혜와 통찰의 젖줄이 되어주는 곳. 거리를 걷다 눈에 띈 서점에 들어가 보았다.

 

서점 내부를 보자마자 금세 흐뭇해졌다. 붉은 벽돌 기둥 사이로 들어 차 있는 책장, 기둥을 넝쿨처럼 감고 올라가는 철제 계단. 한눈에 봐도 참 운치 있는 책방이었다. 서점 내부에 감탄하며 책을 둘러보고 있자니 책에 대한 식욕이 한껏 돋았다. 제목도 모르는 책을 골라 한가운데를 펼쳤다. 꼬불꼬불한 곡선, 조그만 점들이 톡톡 박혀있는 페르시아어 문장들이 보였다. 저 문장들을 모두 입속에 털어 넣고 꼭꼭 씹어 먹었으면 어떨까 하고 문장들이 젖줄이 되어 몸속을 흐르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드니, 책에 몰두하고 있는 여대생이 보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문득 한 여성이 떠올랐다. , 세헤라자데!

 

 

서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한 책방. 기둥을 감아 오르는 철제 계단과 꼬불꼬불한 페르시아어가 참 잘 어울렸다.

 

 

 

세헤라자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이야기꾼이다. 그녀가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친 무대는 바로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헤저르 아프선(천의 이야기)이다. 이 책이 8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됐고 그 후 바그다드, 카이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추가되고 다듬어진 끝에 지금의 천일야화가 만들어졌다. 이야기의 배경은 사산왕조로 이것도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뜻한다. 아라비안나이트는 따지고 보면 페르시안 나이트인 셈이다.

 

천일야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사산왕조의 샤흐리야르 왕은 흑인 노예와 간음하고 있는 왕비를 목격한다. 이후 왕은 배신감에 매일 밤 새로운 처녀와 동침하고 죽이기를 반복하는데, 어느 날 대신의 용감한 딸 세헤라자데가 나타나 1001일 밤 동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덕분에 그녀도, 다른 여인들도, 왕의 인생도 구원한다는 스토리다.

 

1001일 밤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 터라 천일야화 속 이야기는 무려 280여 편, 전체 분량도 한국 번역본 기준 4,000~5,000쪽에 달한다. 얘기가 지루하면 목숨이 위험했으니 사랑· 범죄· 여행· 신선 이야기, 역사이야기, 교훈담, 우화 등 이야기도 다채롭다. 수많은 이야기들은 처음엔 세헤라자데의 입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들 입에서, 또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액자식 구성이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것. 그건 바로 세헤라자데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책에 따르면,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수집한 모양이다. 역대 군왕전, 옛 나라들의 연대기 및 전설, 옛 사람들의 문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탐독했고 역사책을 수집했을 뿐 아니라 많은 시를 외웠으며 철학, 과학, 예술 분야도 열심히 공부했단다. 그야말로 백과전서파 식의 공력. 1001일 동안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이러한 내공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헤라자데는천일야화에서 스토리텔러일 뿐.천일야화를 탄생시킨 페르시아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걸까?

 

 

 

프랑스 화가 레옹 칼레가 1920년대에 그린 그림 샤흐리야르 왕과 셰헤라자데

 

 

 

페르시아는 이야기의 땅이었다. “(페르시아 민족은) 누가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동화와 한량없는 시가 있다.” 괴테가 그의 책 서동시집에서 말했듯 페르시아는 스토리텔링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아케메니아 왕조 시절, 왕의 명령은 광활한 제국 곳곳에서 예능인들이 하프 연주와 함께 전달사항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하명에 이야기를 활용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였다. 루미, 네저미 같은 페르시아 시인들 또한 시 속에 많은 우화를 담았고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 입과 머리, 가슴속을 떠돌다 카펫에, 벽화에, 세밀화에, 수공예품에까지 스며들었다.

 

세헤라자데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한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페르시아의 이야기, 실크로드를 통해 흘러들어온 여행자들의 이야기 등 광활한 지역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이 들려 준 신화, 전설, 민담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천일야화가 작자 미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

 

페르시아의 설화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글이 아닌 평범한 이야기꾼 덕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엘웰 서튼이라는 젊은 영국 저널리스트가 이란을 찾았다. 그는 우연히 이란 저널리스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의 늙은 유모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집된 약 110여 개의 이야기는 후에 이란에서 페르시아 설화집으로 출간됐다. 오늘날 페르시아 설화가 온전히 전해진 건 한 평범한 이란 여성, 현대판 세헤라자데 덕분이었던 셈이다.

 

 

 

5년 전, 30대 이란 여성이 한국 뉴스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퍼테메 하비비저드. 그녀의 직업은 다름 아닌 이야기꾼이다. 그녀는 실제 이름보다 고르다파리드로 더 유명하다. 고르다파리드는 이란의 귀중한 언어 유산이자 대표적인 영웅서사시 샤흐나메(왕서)에 등장하는 한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인. 그녀는 오로지 격정적인 목소리와 다양한 몸짓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스토리텔링 기술(나갈리)은 이란에서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이야기란 글을 읽는 것보다 귀로 들었을 때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이야기의 디테일이 실감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이 궁금해 다큐멘터리 <고르다파리드 이야기>를 보니 나갈리의 준비 작업은 참으로 고되다. 다독의 힘으로 이야기꾼이 된 세헤라자데처럼 그녀도 샤흐나메를 기본으로 구술 능력, 소설, 신화, 서사시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다. 카펫 위에 두꺼운 책, 문서, 신문 등을 펼쳐놓고 턱을 괴고 앉아 이야기의 얼개, 몸짓, 소리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사람들을 샤흐나메의 깊은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다.

 

그녀가 큰 소리로 연습하는 곳은 테헤란에서 가장 높은 국제센터 빌딩과 거대한 도로들이 보이는 메마른 언덕. 베이지색의 헐렁한 옷에 검은색 숄을 두른 그녀의 목소리는 결연하고 표정은 엄숙하다. 고리다파리드가 적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씬. 그녀는 고리드파리드가 되어 투명한 머리칼을 끌어 모아 투명한 투구를 쓰고 성채를 나와 적을 향해 달려간다. 팔을 돌려 투명한 줄을 돌리고, 입으로 줄에 소리를 입힌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샤흐나메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소리와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녀는 21세기에 현현한 세헤라자데였다.

 

 

이야기꾼 고르다파리드. 격정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샤흐나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란에 오기 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들와 마주친 적이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여인은 바로 마르잔 사트라피. 한국에서도 유명한 만화 페르세폴리스의 작가다. 검은 머리칼에 총명한 눈빛을 가진 그녀는 내게 이란이 엄숙한 사람들로 뒤덮인 깜깜한 나라가 아님을 까만색 그림으로 알려준 사람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펑크록을 좋아하던 소녀 마르잔처럼 발랄하고 유쾌했지만 이란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묵직했다. 그녀가 만화를 그린 이유는 간단했다. 이란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오해받는 것을 원치 않아서다.

 

마르잔을 알게 된 얼마 뒤, 또 한 명의 세헤라자데와 마주쳤다. 그녀의 이름은 화리데 칼라트바리. 이란의 동화작가 겸 출판인이다. 2009년 전통 페르시아풍 옷차림으로 내한한 그녀는 내 눈에 마치 페르시아의 이야기를 들고 이란에서 날아온 마녀처럼 보였다.

 

그녀가 펴낸 책들은 다른 동화책들과 좀 다르다. 그녀가 펴낸 이야기 속에선 구름실로 아이들의 웃음을 짜고 소녀의 입에선 웃을 때마다 데이지 꽃잎이 나오며, 꿈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기도 한다. 인생과 관계, 세계와 자아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독특한 그림과 시적인 언어로 펼쳐진다. 한국 독자들은 유럽, 미국 그림책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이에 대한 보답 차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다 이란으로 돌아갔다.

 

 

펑크록을 좋아하는 이란 소녀, 페르세폴리스 마르잔

 

 

한국에 방문하여 아이들과 만난 이란의 동화작가, 화리데 칼라트바리

 

 

샤흐리야르 왕은 1001번 째 밤이 지나고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이상하게 세헤라자데를 죽이지 않았다. 바로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으로 치유된 것. 퍼테메가 몸으로 들려주는 샤흐나메는 오랜 세월 이란인들에게 뿌리가 되었던 이야기이다. 그들은 옛 페르시아 왕들의 일대기를 통해 아랍의 침략 (이슬람 도입) 이전 자신들의 역사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눈과 귀로 끊임없이 되새겨 왔다. 마르잔은 검은 잉크로 전 세계에 이란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화리데는 색색의 조각보 같은 이야기로 어린이들에게 다른 눈과 길을 열어주고 있다. 셰헤라자데와 그 후예들을 보면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란에 가게 된 것도 이야기, 이란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였다. 셰헤라자데의 땅 이란은 공교롭게도 가장 베일에 싸인, 가장 이야기를 꽁꽁 숨겨둔 나라였기 때문이다.

 

천일야화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 나도 이야기의 꼬리를 따라가다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세헤라자데들의 이야기 속에서 이란이라는 문이 열렸고, 이란에서 만난 이야기들 속에서 의 이란 이야기라는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세헤라자데와의 마주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난 이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또 다른 세헤라자데를 꿈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