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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최승아|오, 이런! 이란!

피스타치오 같은 도시, 테헤란

 

 

언니 여기에요!”

 

시장통 같은 공항 검색대를 빠져나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내 앞에 마중 나온 후배가 보였다. 흰 코트를 입은 후배는 히잡 대신 코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 있었다. 옆엔 일행으로 보이는 건장한 이란 남자가 두 눈을 끔벅이며 저 여자인가보다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후배는 과 후배인 동시에 일하게 된 회사의 선임이기도 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온 건 바로 이 때문. 동행한 이란 남자는 회사 소속 운전 기사였다. 후배와 안부를 주고받으며 차 뒷자리에 나란히 타자 차는 곧장 테헤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메마르고 황량한 땅이 창문 밖에 가득 펼쳐졌다. 테헤란은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야 나온다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지러운 시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테헤란 남부였다. 후배는 무심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난 두 손을 꼭 잡은 채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테헤란 남쪽은 엉킨 실처럼 모든 것이 얽혀있었다. 도로를 메우고 있던 차도, 건물도, 사람들도 모두. 풍경 전체엔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듯 했고 아슈라(이맘 후사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시아파 이슬람 최대의 행사) 준비 때문인지 검은 깃발까지 휘날리고 있었다. 대낮이었지만 창밖 풍경은 어둡고 음울했다. 북쪽으로 올라가자 먼지가 걷히는 듯 거리는 말끔해졌고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자 드디어 차가 멈추어 섰다. 내가 내린 곳은 테헤란 북쪽 페레시테 거리의 한 고급 빌라였다.

 

일주일 간 후배 침대 옆자리에서 지내다가,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본격적인 테헤란 라이프가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알다시피 강남 테헤란로의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따온 말이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테헤란로 기념 비석엔 검은색 글씨로 خیابن تهران(테헤란로)’라고 새겨져 있다. 1977년 서울시와 테헤란이 자매결연 맺으면서 휑한 삼릉로는 테헤란로가 됐고, 오늘날 국제금융기관과 IT벤처기업이 밀집된 일명 테헤란밸리가 됐다. 고려사엔 흥미로운 얘기가 하나 나온다. 내용인즉슨 고려 현종 당시 테헤란 사람들이 상인들을 이끌고 한국을 다녀갔다는 것. 테헤란로가 무역중심지가 된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테헤란로는 강남 테헤란로에서 아주 멀다. 테헤란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8시간 거리인 거대한 이란 땅 북쪽, 동서로 뻗은 알보르즈 산맥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 들어서 있다. 테헤란이 수도가 된 건 사실 22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엔 별 볼일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16세기 이전 기록이라고는 석류가 풍부한 마을이라는 기록밖에 없을 정도. 1220년 몽골이 테헤란 근처 레이 지방을 휩쓸자 탈출자들이 테헤란에 몰려와 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16세기 중반, 사파비조의 한 왕의 눈에 들어(왕은 테헤란의 푸르른 나무, 주위를 흐르는 강, 좋은 사냥 조건에 반했단다.) 테헤란엔 푸른 정원과 벽돌집, 대상인 숙소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카자르조 때에 이르러서는 결국 이란의 수도로 등극했다. 이후 몸집을 불려간 테헤란은 팔레비 왕조의 근대화 정책으로 반듯해져 갔고 오늘날 테헤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테헤란은 현재 남쪽을 제외한 90%가 바둑판식처럼 짜인 격자도시다. 석유가 불러들인 돈은 페르시아 건축물들을 부수고 모던한 건물을 세워나갔다. 거대한 도로, 도로를 잇는 광장, 공원도 늘어갔다.

 

승아, 집 진짜 좋은 것 같아.”

 

. 한국 집보다 훨씬 넓은 것 같아요.”

 

이사 간 집은 테헤란 북쪽 조르단(요르단) 거리에 있는 한 고급 빌라였다. 집에 처음 들어선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새 집은 정말 넓었다. 이란에 와서 이렇게 좋은 집에 살게 될 줄이야. 같이 살던 선후배 2명과 월세를 분담하고 회사 지원금도 있어 돈에 대한 부담은 없었지만 당시 한국 돈으로 월세 120만 원이 넘는 첫 집은 우리에게 넘치는 수준이었다. 연분홍빛 카펫이 깔린 넓은 거실엔 푹신한 소파와 벽난로가 있었고, 거대한 창이 달린 내 방엔 붉은 카펫, 그 위엔 운치 있는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테헤란은 서울과 달리 강이 아닌 광장을 기준으로 남북을 가른다. 발리야스르 광장 기준으로 북쪽은 남쪽보다 고도도 높지만 사회적 고도도 높다. 부유층이 이곳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팔레비 왕조의 궁전이 북쪽에 들어서자 이곳에 자연스레 고급스런 거리가 형성되었다.

 

테헤란 판 평창동, 압구정동, 청담동이 모여 있는 이곳엔 라코스테, 베네통, 디젤 등의 브랜드숍과 종합 백화점, 소규모 고급 옷가게, 커피숍, 서점, 그리고 일식, 중식, 이탈리안 레스토랑, 고급 이란 뷔페 , 타이 레스토랑 등 어느 나라 도심에나 있을법한 상점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한류 열풍으로 이란을 방문한 송일국도 이 근처 에스테그럴 호텔(전신 힐튼 호텔. 이슬람 혁명 후 독립을 뜻하는 에스테그럴로 이름을 바꾸었다.)에 머무르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여기 혹시 테헤란이야?”

 

어느 날 개인 홈페이지에 타이 레스토랑 사진을 올렸는데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럼 내가 테헤란에 있지 방콕에 있었을까. 언젠가 한 커피숍 사진을 올렸을 땐 이런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란에도 이런 곳이 있군요.” 테헤란 북쪽엔 한마디로 여기가 이란이야?”라는 댓글이 달릴만한 곳들이 가득했다. 하기야 모던한 그 풍경을 처음 본 순간, 나 또한 놀라움의 연속이었으니. 경험할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한국의 1970년대식과 같은 투박한 건물 속엔 모던한 핫플레이스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테헤란의 느린 생활 속도 때문인지 때론 여유로운 유럽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예상외로 지극히 모던했던 이 세계가 바로 1년간의 내 세계였다. 회사 생활이 바쁘기도 했지만, 테헤란 남쪽은 가볼 시간도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당시 내게 테헤란은 테헤란 북쪽이었다. 그곳에서 난 커피와 케이크, 한국밥과 스시, 피자, 팟타이, 중국 음식을 먹어가며 한국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란 테헤란로에서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양 살고 있었던 것.

 

 

 

 

생동감 넘치는 테헤란의 미르더머드 거리(출처 teheran 24). 테헤런에 자리한 모던한 카페의 모습

 

 

회사에서 가까운 바낙 광장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소녀가 내게 다가왔다. 소녀가 내민 손 안에 든 건 다름 아닌 껌 세 통. 껌을 좀 사달라는 거였다. 때 묻은 스카프를 쓴 소녀의 눈빛에서 다급함과 체념이 느껴졌다. 그 눈빛은 <천국의 아이들>에서 본 눈빛이 아니었다. 소녀는 테헤란 남쪽 빈민가에서 올라온 게 분명했다.

 

소녀를 만나고 얼마 뒤 테헤란 남쪽 세계의 문이 열렸다. 회사생활을 정리하면서 테헤란 남부 작은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던 것. 낡은 골목을 따라 만난 두 번째 집. 집 건물은 마치 먼지를 끌어 모아 지은 것 같았다. 그날, 날 처음 맞이한 건물도 처음 건물을 본 내 낯빛도 모두 창백했다. 바로 전날까지 살던 첫 번째 집과 화려한 북쪽 거리는 신기루가 되어 있었다. 그 뒤 한국에 돌아 올 때까지 더 깊숙한 남쪽은 가보지 못했지만, 영화 <테헤란> 속 빈민가 풍경으로 그곳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공 이브라힘이 고된 일을 끝내고 걸어가던 시장 골목, 붉은 토마토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바나나, 내놓고 파는 초라한 그릇들도 모두 이브라힘처럼 참 쓸쓸해보였으니까.

 

기숙사에서 첫날을 보낸 다음날 출근길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택시를 타고 드넓은 고속도로, 발리야스르 대로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마치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만 같았다. 뿌연 하늘 아래 펼쳐진 북쪽 거리와 회사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슬람 혁명을 낳은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생활수준의 양극화 문제였다고 했다. 처음 남쪽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던 그때, 비로소 난 그 무게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20세기 중반까지 테헤란 남쪽은 명실상부 테헤란의 중심부였다. 오래된 거리는 지금도 넉넉한 품으로 대학교, 국가기관, 전통 시장, 수많은 박물관, 근대화의 물결에서 살아남은 옛 페르시아의 건물들을 품고 있다. 좀 더 남쪽엔 페르시아 사람들이 일부러 좁게 설계한 골목들이 미로처럼 펼쳐진다. 이웃과 자주 부딪히도록 좁게 만든 거란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두 남매가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골목도 바로 이곳. 여행자들이 쉬라즈나 이스파한 같은 페르시아 풍 도시와 함께 테헤란을 놓칠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또 다른 핫플레이스때문이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 중 한 장면

 

 

 

테헤란은 사실 겉으로만 보면 심심한 도시다. 밤엔 밀러드 타워를 중심으로 금빛 은하수가 펼쳐지지만, 아침이 되면 희멀건 빌딩, 사람들, 버스와 택시행렬이 뿌연 먼지 사이로 어김없이 드러난다. 건물에 그려진 반미 선전 벽화, 거리 속 검은 차도르 물결로 도시는 더욱더 음울하게 보일 뿐. 파리, 뉴욕 등 유명 도시와 비교하면 딱히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하기도 좀 망설여진다. 도시는 마치 개발 광풍이 일던 1970년대에서 딱 멈춘 것만 같다.

 

이렇듯 민숭민숭한 테헤란 거리였는데 지금 내 기억 속엔 어떤 곳보다 선명하고 생생하게 남아있다. 테헤란에 있을 때 다녀온 중동의 파리 베이루트와 진짜 프랑스의 파리, 그리고 이스탄불과 중동의 기적 두바이보다도 말이다. 2년을 그곳에서 살았으니 정든 건 당연지사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란에서 생산되는 견과류 중에 피스타치오가 있다. 조개처럼 입을 벌린 껍질 안에 붉은 속살을 숨긴 피스타치오는 모양새는 밋밋하지만 맛이 고소해서 한번 먹으면 자꾸 손이 간다. 테헤란 북쪽과 남쪽을 넘나든 18개월. 생각해보면 테헤란은 작은 피스타치오 알맹이로 이뤄진 거대한 피스타치오 나무 같은 곳이었다. 밋밋한 껍질을 벗겨내 알맹이를 맛보는 기쁨, 이를테면 발견의 기쁨이 존재하는 도시가 바로 테헤란이었다.

 

18개월의 시간을 빨리 감기로 되돌려 심심한 거리 속 빛나는 풍경들을 다시 본다. 북쪽 발리야스르 거리, 이 거리는 테헤란에서 가장 즐겨 걷던 거리였다. 연둣빛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고 알보르즈 산맥에서 흘러 내려온 차가운 물은 나무 밑을 흐르며 건조한 테헤란 공기를 적셔주곤 했다.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툭툭 발로 차며 거리를 걷다가 영화박물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커피숍 안에 앉아 테헤란에 쌓인 눈을 보며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호로록 마시기도 했다. 수많은 천들을 매만졌던 히잡 가게, 주황색 립스틱과 작은 구슬 귀걸이를 샀던 탄디스 백화점, 쪼그리고 앉아 불법 복제 CDDVD를 고르던 페르도우시 서점……. 그 거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내가 그곳에 서있거나 앉아 있는 것만 같다.

 

모서리가 해진 여행서의 테헤란 부분을 펼치면, 곳곳에 노란 형광펜 자국이 빛바랜 색으로 남아있다. 그곳을 펼치면 동시에 테헤란 남부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골레스턴 궁전의 반짝이던 거울방, 보석 박물관의 183캐럿 핑크색 다이아몬드, 카펫 박물관의 색색 카펫들, 현대미술박물관 속 물결 같은 서화, 도자기 박물관 속 영롱한 빛깔의 도자기들. 이 모든 것들은 담박한 도시 속에서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도 위 콩알만 한 토히드 광장을 봐도 내 눈에는 그 광장 전체가 생생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흰 치즈를 얹은 빵, 붉은 홍차, 녹은 버터가 스며든 밥, 구운 생선과 가지, 토마토를 먹으며 친구들과 보낸 7개월의 시간들도.

 

 

 

 

토히드 광장 거리에서. 이곳을 생각하면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테헤란을 감싸고 있는 껍질은 두껍다. 페르시아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 험악한 선전벽화, 검은 차도르 물결, 그리고 테헤란에 관한 백지처럼 빈약한 정보와 편견까지. 이 모든 것들은 지금도 친절한 테흐러니(테헤란 사람을 뜻하는 말)와 테헤란의 핫플레이스들을 두꺼운 껍질처럼 감싸고 있다. 처음 내게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껍질을 조금씩 벗겨내니 !’ 껍질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다채로운 속살들이 드러났다. 때론 달콤하지만 때론 시큼털털하고 어쩔 땐 씁쓸하기도 한 속살들이. 시간이 흐르고 벗겨낸 껍질이 하나 둘 쌓여갈수록 테헤란은 다양한 풍미로 가득 찬 도시로 변해갔다.

 

오랜 세월동안 피스타치오 나무 밑은 연인들의 밀월 장소였다. 피스타치오가 익으면 껍질이 저절로 벌어지며 쪼개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를 들으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 때문이다. 테헤란 안에 1년 넘게 있었더니, 툭툭 껍질이 벌어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이 내게 행운처럼 흘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