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번째 이야기: 아버지의 노래
김금숙 작가가 지은 책, 《아버지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멋들어지게 그려진 표지 속 소나무 그림에 눈이 끌렸고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한 우리 작가의 만화라는 점에 호기심도 생겼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아버지의 노래’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문득 내 아버지의 노래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18번 말이지요.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아버지의 노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입니다.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총각 선생님과 이별하는 아쉬움을 담은 노래 가사를 아버지는 멋들어지게 소화하시곤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섬 색시 입장이 아니라 총각 선생님 입장에 감정 이입하셨을 테지요.
스물이 되기도 전에 교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신 아버지의 실제 추억을 담고 있는 것인지 이루지 못한 로망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모이는 잔칫날, 아버지가 이 노래를 거나하게 부르신 날이면 어머니와 누이들은 “그 섬 색시가 누구냐?” 물었고, 장난 섞인 질문과 추측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48년 열아홉의 평안도 젊은이가 선생이 되었을 때, 최소한 입에 풀칠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기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분단이 되었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강제 징집을 당했고, 포로가 되었고,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아무 연고도, 기반도 없는 휴전선 이남에 살기 위해 국군에 입대했고, 제대해서는 가까스로 작은 양조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가여운 내 아버지의 인생입니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 세월을 살아오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충격, 얼마나 큰 공포와 대면해야 했는지, 얼마나 큰 상실감과 상처를 겪었을지, 얼마나 여러 번 좌절하고 일어났을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지, 외로움에 울었을지…
《정가네 소사》의 정용연 작가가 말했듯,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비극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면서 모든 가족은 저마다의 드라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우리 삶에 큰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애써 덮어두려 해도 힘들 때마다 성이나 큰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들 가족의 상처가 더 자주 이야기되면 좋겠습니다. 아픔의 기원을 찾고 나누면 치유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이 왜 지금의 우리 가족으로 살고 있는 것인지 알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멘토들이 들려주는 힐링의 메시지보다 더 좋은 내 삶의 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유기농 힐링을 위해 부모님의 '소싯적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 《아버지의 노래》는 제목과 달리 어머니의 인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솔직하게 들려주는 가족의 역사는 공감과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니까요.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 이야기》, 조동환 님의 《놀라운 아버지》도 같은 이유로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섬 색시는 누구? 조만간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께 노래 한 자리 청해야겠습니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초식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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