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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2002년, 1990년대 시민운동의 변화를 예고하다

 

 

 

 

 

1) 백화점식 운동에 대한 문제 제기

 

사회적 영향력의 확장이 그칠 것 같지 않던 시민운동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총선연대 활동을 거치고 난 2002년 무렵이었다. 2000년 총선연대 활동은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2001년만 해도 시민단체들의 영향력은 여전해서 그런 변화를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2001년에는 사회 전체가 의약분업 문제로 논란이 분분한 해였는데, 거의 모든 관련 토론 프로그램에는 경실련, 참여연대, YMCA의 정책 파트 책임자들이 나와서 우리나라 의료체계, 의료수가 문제 등을 놓고 보건복지부 관계자, 의사, 약사 등과 설전을 벌였다. 지금의 의약분업 체계는 당시에 그 골조가 정해진 것인데, 관련 위원회에도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역할을 했다.

 

의약분업에 대해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나름의 이유를 들며 반대했고, 이익단체의 이익이 우선이 아니라 국민 건강이 우선이라며 정부와 시민단체는 강하게 비난했다. 의약분업에 대한 논란의 과정에서 특히 의사회가 시민단체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다. 얼마 전까지 정치개혁에 관해 중요한 논객으로 활동하던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이제는 의약분업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토론에 나서는 것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 모든 사안에 대해 전문적으로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 얼마든지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견해가 있지만 의사회의 이런 제기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시민단체가 모든 사안을 다 전문적으로 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 만한 지적이었다. 왜냐하면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관련 전문가가 나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무 책임자들이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시민단체들의 전문성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을 이 일을 계기로 전문가 집단들은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인 과제를 자신의 의제로 하고 있던 시민단체들에는 더 전문적인 역할로 세분화해 나가야 한다는 요구도 강해졌다.

 

백화점식 운동이라며 시민단체들의 전문성에 대해 비판하던 흐름은 의약분업 문제를 계기로 더 강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익단체들의 반대를 넘어서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주장하던 대로 의약분업은 시행되었지만, 시민단체에 대한 전문가 집단의 회의라는 결과도 함께 얻었다. 1990년대에 거의 대부분 사회집단이 시민단체를 신뢰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한산한 2002 대선연대와 북적대는 노사모

 

내가 시민단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느낀 것은 2002년이다. 2002년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 해이기도 하다. 기억을 살려보면 미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으로 인터넷의 각종 카페에서는 끔찍한 사진들과 함께 미군에 대한 비난 및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논란이 계속되었고, 월드컵이 끝나고 난 뒤에는 촛불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연말 대선까지 굴욕적인 소파(SOFA)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여름에는 월드컵 열풍으로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전국의 어느 광장이든 모여들어 함께 어울려 지내는 색다른 문화 경험을 한 해이기도 하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서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라 불리는 노사모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활동하면서 유권자들은 과거와 다른 경험을 했다.

 

이처럼 2002년은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전 국민이 거리에 나와 공통의 경험을 가졌던 색다른 해였다. 당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이기도 했고,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사무처장이기도 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 자금의 투명화 등의 정치 개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시민단체 연대기구의 공동사무처장을 맡기도 했다. 불과 2년 전 총선연대 활동을 통해 시민단체들이 정치개혁을 위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었기에, 대선연대를 시작하기 전 시민단체들은 2년 전 못다 이룬 정치 개혁 과제들을 이번 대선을 통해 확장하려고 생각했고, 총선연대와 달리 준비도 차근차근하고 있었다.

 

총선연대 당시의 활동을 기억하며 전국 YMCA의 건물 7층 강당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각 단체로부터 파견받은 상근자들과 함께 처음부터 각 영역을 잘 나누어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민들로부터 별다른 요구와 접속이 많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여중생 사망 사건 같은 큰 사건이 있고, 차떼기 같은 정치 자금 스캔들로 시끄러울 때라 응당 대선연대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클 것이라고 보았는데, 분위기가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그리 임팩트 있는 활동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치자금의 투명화라는 과제에 대해 각 정당의 회계 장부를 대선연대가 회계사들과 함께 들여다봄으로써 정당에 대한 시민감시라는 영역을 만들어 냈다는 성과와, 투표율을 높이고 투표의 편의성을 확장하기 위해 대학 내 투표소 마련이라는 성과 정도를 제외하면 대선연대는 분명히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활동을 마감해야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편으로는 방송을 진행하면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가끔 멍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선이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후, 그해 연말 어느 날 방송이 끝난 후 피디들과 술을 한 잔 나누는 자리에 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가 합석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안 기자가 대뜸 내게 질문을 했다. “하 선배, 시민단체들은 왜 이번 대선에서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한 거죠? 왜 유권자들은 시민단체와 함께하지 않고 노사모에 더 관심을 보였을까 고민해봤나요?” 나는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했다. 안 기자가 그 날 던진 질문은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만나 안 기자에게 그 날 던진 질문 때문에 한동안 고민이 많았노라고 하자, 자기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나 어쨌다나. 그러나 시민단체 활동과 노사모를 같은 선상에 놓고 고민해보지 않았기에 그 질문을 받고 비로소 , 그러고 보니 노사모에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지지라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그동안의 정치 과정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 현상이었다. 2002년 당시로 보자면 2000년과 달리 유권자들은 정치 개혁이라는 과제를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을 통해 이루고자 한 셈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시민단체에 대한 시민들의 낮아진 관심을 설명하기는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3) 1990년대의 시민운동들과 다른 모습의 시민운동들이 시작되다

 

안수찬 기자가 던진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는 내게 2000년 이후 2년 동안의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2003년 들어서 꽤 괜찮은 수입을 보장해주던 시사프로그램의 MC도 내려놓고 시민운동에 대해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민운동은 점점 더 시민과 멀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이끌던 박원순 변호사가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만들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민운동의 영역을 열었다. 특히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는 나눔이라는 가치와 재활용이라는 가치를 사회에 확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운동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율적인 민간 재단이라고는 손에 꼽는 상태에서 나눔이라는 가치를 전 사회적인 가치로 끌어 올린 아름다운재단의 공은 기억해둘 만하다. 지금은 서울 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1990년대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시도를 시작한 셈이었다.

 

아름다운 재단이 시민운동의 영역을 넓혀 놓기는 했으나, 1990년대 시민운동의 중심적 단체들이었던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단체의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 경실련은 1990년대에 비해 완연히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참여연대도 예전만큼의 활동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더구나 2003년에는 새만금 갯벌을 보존해야 한다는 종교인들의 목소리가 환경단체들을 넘어서 주요한 운동으로 전개된 해이기도 했다. ‘삼보일배라는 새로운 운동 방식이 수경 스님을 통해 시작되었다. 아직 방송을 진행 중이던 나는 방송이 없던 휴일에 삼보일배 행렬을 찾았다. 묵언 수행을 이끌던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을 뒤쫓아 하루를 삼보하고 일배하며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지나오며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행렬을 돕는 시민단체들도 함께 고생하고 있었지만, 비폭력운동을 한다고 해온 시민운동 과정에서 언제나 시민운동은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성찰과 반성이 몸을 휘감았다. 그날은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나타났던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이 그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하루였다. 무언가 운동의 전환이 참 절실하다 싶은 생각을 한번 더하게 되었다.

 

뒷날 환경단체들이 실상사에 모여 환경단체 10년을 평가하는 토론회를 연 적이 있다. 300여 명이 넘는 전국의 활동가가 모인 그 토론회의 사회를 보면서 이상하게 삼보일배라는 운동을 평가하지 않기에 사회자이면서도 그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사에서 삼보일배만큼 생태적 가치를 대중적으로 확산한 경우가 있었는가?”를 물었는데, 의아하게도 삼보일배는 환경단체들의 활동이 아니었던 탓에 평가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 다른 운동이 성장하고 있는데, 시민운동이 자신 내부에 집착해 변화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름다운 재단이나 아름다운 가게, 삼보일배 같은 운동이 시민운동의 다른 흐름을 만들고 있는데 정작 변화가 필요한 시민단체들은 그 변화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