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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뒤늦게 깨달은 2002년의 충격

 

 

 

 

 

1) 2004년 탄핵 반대와 시민운동

 

2004312,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투표가 국회에서 있던 날, 나는 어느 토론회에 패널로 앉아 있었다. 전화기를 꺼두고 있어서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토론회를 마쳤는데, 다시 전화기를 켜기도 전에 함께 했던 패널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패널은 조선일보 측 인사였는데, 뭐랄까, 당연하다는 표정이랄까, 으쓱하는 기분이 담긴 것이었다고 할까? 하여간 좀 묘한 표정으로, 궁금해하실 소식을 전해드리죠, 하더니 탄핵안이 찬성 193표로 2/3가 넘어 가결되었다고 얘기했다.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무슨 중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실제 무슨 기획을 하고 실행을 한 것 아닌 데, 자기 생각을 표현한 말 한마디를 가지고 대통령을 그만두게 하겠다는 것이니 도대체 여의도의 국회의원들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때마침 전화기가 켜지고 들어 온 음성메시지와 문자메시지들은 여의도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기자 회견이 있다며.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던 대통령 탄핵소추의 순간이다.

 

 

 

지금 논란이 되는 18대 대선에 대한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선거 개입에 비하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주실 것을 기대한다.”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2004년 총선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는 대통령이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를 위반하면서, 선거 개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왔다. 급기야 의회 다수당이라는 위치를 이용 민주당과 함께 탄핵안을 상정하게 이른다. 이는 당시로 보면 한나라당이나 심지어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하기 이전의 집권당인 민주당에서조차 노무현이라는 존재 자체를 하찮게 여기고 비웃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전형적인 여의도 정치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탄핵소추안은 열린우리당과 분당한 민주당에서 처음 제기했을 정도였다. 정치권의 노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공세는 즉각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중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2002년 시작된 전국적인 촛불 시위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즉각적으로 전국적인 탄핵 반대 시위로 옮겨갔다.

 

당일 여의도에 모여든 시민사회단체들은 기자 회견을 마치고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고, 다음 날 당장 광화문에서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고 탄핵 반대, 민주 수호라는 공동의 슬로건에도 합의했다.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민주노총 등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노사모는 노사모대로 당일 여의도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밤사이 신속하게 움직인 시민사회단체들은 다음 날 광화문에 탄핵 반대를 위한 첫 번째 시민 집회를 만들어 냈다. 이후 5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할 때까지 시민단체들의 집회는 이어졌다.

 

탄핵안이 가결된 당일부터 문자로, 블로그로 관련 소식들을 전하며 순식간에 사람들은 여의도로 몰려들었고, 특별한 홍보를 하지 못했지만 이튿날 광화문 집회에도 수만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다 전화의 문자메시지와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확인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집회 무대와 집회 프로그램, 출연자 등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만든 것이지만 집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새로운 소통 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민들이었다. 시민단체가 자신들의 소통 망을 통해 아무리 대규모로 동원한다 한들 수만의 시민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리 현실성 있는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각성하는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첫날엔 집회를 위해 참여한 시민사회단체들이 각기 분담금을 내기도 했지만, 이후 집회는 참여한 시민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졌다. 필자도 주최 측 인원의 한 사람으로 모금함을 들고 집회 현장을 다니기도 했는데,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10, 20만이 모여드는 집회 현장을 구성하려면 그만한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멀리 떨어져 앉은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대의 모습과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설치해야 하는 음향 시설의 비용만 해도 적지 않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필요한 비용은 현장에서 다 만들어졌다. 집회를 하고 나서 실무자들은 밤새 들어온 현금을 정리하기에 바쁘기 일쑤였다.

 

2000년대 초반 위축되던 것처럼 보였던 시민단체들은 아연 활기를 찾았다. 그런데 노 대통령과 정치 개혁과 같은 근대적 의제들에서는 입장이 같았지만, 환경 문제 같은 탈근대적 문제에서는 견해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에, 그간 참여정부와 시민단체들이 우호적이었다 할 수 없었다. 탄핵안 반대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에 관한 인식을 공유한 대중적 흐름을 같이 한 것과 별개로 시민단체들이 가진 의제들에 관해서는 노무현 정부와 이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2) 탄핵 반대 집회와 시민운동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기까지 집회는 계속되었고, 결국 헌법재판소는 초유의 대통령 탄핵안을 기각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시민단체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세력에 대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고 단체들의 본래 의제들에 관한 활동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004년 탄핵 반대 집회를 보면서 2002년에 가졌던 나의 의문은 해결됐다. 2004년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며 촛불을 든 것은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시민단체들의 조직에 의해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2004년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은 탄핵 반대 집회 이후에도 1990년대의 주요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축소될 가능성이 있음을 진단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불필요한 구절을 일부 삭제하고 덧붙여 본다.

 

 

광화문에 모인 20만에 가까운 시민들은 탄핵무효범국민행동으로 모여든 시민단체들만의 힘으로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실제 조직 과정에서 역할을 한 것은 인터넷의 수많은 자발적 카페와 블로그, 게시판,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들이었다.

 

의사소통 수단이 대중화되고, 정보의 유통 속도가 실시간에 가깝게 이루어지면서 개인들이 내리는 결정도 그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쩌면 시민단체들은 이들 앞에서 이들을 조직했다기보다 시민단체들보다 먼저 거리에 나선 이들과 발걸음 맞추면서 시민운동 역사상 가장 대중적 운동과 결합한 셈인지도 모른다.

 

이런 징후는 이미 2002년에 볼 수 있었다. 미선 효순 양 추모와 주한미군의 범죄에 대한 대응은 인터넷의 수많은 카페와 게시판이라는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기존 시민단체처럼 많은 상근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전문가들과 결합해 있는 것도 아니다.

 

카페와 게시판에 모여든 자발적 행위자들이 의견을 내고 모으며 행동을 조직한다. 지속적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단속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들이 모으는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며 무조건적 지지자 그룹으로 존재하는 양상 등 부정적 모습도 보이지만, 무엇보다 자발성에 기초한 움직임이라는 점이 과거 '동원'되던 소극적 시민에서,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의제를 만들고 확산하며 항의를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과정은 기존의 시민단체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일상적 시기에는 이들은 여러 다양한 서클적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블로그나 게시판을 통해 개인의 운동이라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의 운동을 펼쳐가고 있다. 그들이 내거는 의제나 운동 방식은 이미 가치의 측면에서 그리고 운동 방식의 측면에서 기존의 시민단체를 뒤로하고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기존 시민단체가 1990년대식 운동을 고집한다면, 더는 미래의 운동 주력군이 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의 여울 앞에 선 시민운동’, 하승창, 2004. 7. 오마이뉴스

 

 

이 이야기의 시작 무렵 이야기했듯이 2004년은 1990년대에 생성하고 성장했던 시민운동에는 중요한 변곡점이기도 했다. 탄핵반대집회가 가져다주었던 시민단체와 시민들과의 결합은 사실은 일종의 착시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던 것임과 동시에, 여전히 시민들이 시민단체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민운동에선 이 시기가 자기 성찰과 변화를 해야 할 적절한 때였던 셈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총선연대 활동을 이끌었던 박원순 변호사는 이미 2000년 아름다운재단 창립, 2002년 아름다운가게 창립 등으로 시민운동의 저변을 넓히고, 시민운동이 사회적 목표로 하는 의제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내가 함께하는시민행동을 창립해 다른 방식의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을 두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낭비를 막는 밑 빠진 독상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박원순 변호사의 아름다운재단 창립이나 아름다운가게 창립이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수단이나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좋은 일이라는 인식이 더 일반적이었다. ‘밑 빠진 독상같은 프로그램도 시민운동의 본격적 프로그램이 된다기보다는 재밌는 패러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2002년과 2004년 시민들이 보여준 행동 양식과 소통 방식은 사실 사회운동의 지형이 또다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