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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그때 그 시절, 군보다 셌던 경실련

 

 

 

 

 

1990년대 시민단체들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언론보도가 있다. 시사저널이라는 주간지는 매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펼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들을 선정한다. 알다시피 지금의 시사저널은 1990년대의 시사저널과는 좀 다르다. 삼성 관련 기사를 게재하는 문제로 촉발된 기자들과 경영진의 싸움으로 당시 기자들이 대거 나와 시사인이라는 잡지가 만들어졌다. 지금 시사인을 만든 사람들은 당시에는 시사저널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시사저널은 여전히 이 조사를 매년 하고 있다.

 

이 조사는 매년 진행하므로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 영향력 있는 집단의 변화 추이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매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조사 당시의 대통령이다. 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은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과 여전히 건재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대부분 김수환 추기경이 대통령을 제외하고 2위를, 이건희 회장이 3위를 차지하는 이 순서는 크게 변동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이건희 회장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일 수도 있다.

 

잠시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1993년의 이 조사에서는 이전의 조사와는 다른 점들이 나타났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나 세력에 관한 조사에서 재야, 학생 세력이나 군부가 하위권으로 밀려나고 시민단체가 순위에 진입한 것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조사에서도 경실련을 창립한 서경석 목사가 처음으로 순위에 들었다. 시사저널은 이 변화를 주목해서 당시에 표지 이야기를 경실련, 군보다 세다라고 뽑았다.

 

이 조사 결과는 1980년대의 민중운동에서 1990년대의 시민운동이 주요한 사회운동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일종의 신호로 보였다. 동시에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요 세력이나 집단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특히 군부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감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였다.

 

 

 

                                                    

 

 

                1993년 9월20일 경실련 중재안을 토대로 한 ‘한약 분쟁 타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출처: 경실련 홈페이지)

 

 

 

 

경실련과 서경석 목사의 영향력이 이처럼 커진 배경은 경실련이 창립 이후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정부도 속수무책이던 한·약 조제권 분쟁 조정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설문 조사 전에 언론에 크게 부각된 경실련의 한·약분쟁 중재 노력과 조정 능력이 시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 세력의 퇴조라는 시대 흐름과는 별도로 한낱 시민운동단체가 전경련과 노총 등 거대한 이익단체와 종교 집단, 언론매체의 힘을 앞질렀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다(시사저널 208,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경실련 군보다 세다, 1993.10.21.).

 

 

한약 분쟁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사회적 사건이었다. 한의사와 약사 간의 한약 제조권을 둘러싼 분쟁을 두 단체 간의 자율적인 협의는 물론, 정부조차 어찌하지 못하고 한의대생들과 소비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경실련이란 시민단체가 중재에 나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 분쟁과 갈등 조정에 관한 적지 않은 논문들이 이 사례를 기초로 나오기도 했고,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한 연구 주제로도 적지 않게 인용됐다.

 

경실련이 이 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한의대생들이 경실련 강당에 와서 농성을 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경실련 정책실의 담당 간사는 지금은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최홍엽 박사였는데, 갈등 과정 내내 최 교수가 고생하다가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는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최 교수가 예비군 동원 훈련이 있어 그 자리를 누군가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경실련 회의실 한 곳을 한의사회와 약사회의 협상장으로 마련하고, 기자들의 접근을 막고 일주일 동안 서경석 당시 사무총장의 중재로 협상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관련 연락이며, 자료 복사며, 보도 자료 배포며 혼자서 다 진행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실련 강당에서 두 집단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이루어졌고, 공중파들의 9시 뉴스에 생중계로 이어지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니, 경실련에 대한 인지도나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은 극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일간지 만평이나 4컷 만화에는 보건복지부의 간판을 내리고 경실련 간판을 올리는 만화들이 나올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창립 이후 금융실명제를 부패 청산의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 주장해오던 경실련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이후 한약 분쟁이라는 갈등 조정은 이처럼 경실련과 시민운동, 창립자였던 서경석 목사 개인 모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 단체, 개인의 위치로 끌어올린 중요한 계기였다.

 

 

* 한약 분쟁의 사회적 의미

한약 분쟁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운동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성격이 다른 사회 갈등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라는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해보겠다. 아래 내용은 졸저 하승창의 엔지오 이야기에 실려 있는 것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1993년의 한약분쟁은 한의사와 약사 간의 약업권, 즉 한약에 관한 두 집단 간의 영역 다툼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즉 두 전문 집단 간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 분쟁이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나라 의료 전달 및 교육체계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분쟁의 직접적 발단은 약사법 시행규칙 한 조항의 개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약사법 시행규칙 제1117호는 약국은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청결히 관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인데, 한의사들은 이 조항을 약사의 한약 조제 금지 규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부가 이 조항을 삭제하려 하면서 분쟁은 시작되었다. 한의대가 늘어나면서 배출되는 한의사가 늘어나는 와중에 이 조항의 삭제는 약사까지 한약 조제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므로, 한의사와 한의대생의 반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약사는 약사대로 이미 한약 조제를 하고 있었고 그동안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므로 한의사들의 반발로 갑자기 규제하게 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래의 한의사인 한의대생들의 반대가 가장 적극적이어서 1993년 신학기가 지나면서는 수업을 거부하고 삭발과 집회, 농성 등으로 싸워 오던 한의대생들의 집단 유급이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보건사회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보사부는 약사법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정안을 마련하지만 한의사, 약사, 시민단체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한의대 교수들의 사표, 약대생들의 수업 거부, 약사회 측의 면허 반납과 휴업 등 오히려 사태는 더욱 확장되는 추세로 이어지고 있을 때, 경실련이 중재안을 발표한다.

 

경실련의 중재안을 중심으로 한의사회와 약사회는 경실련을 포함한 한약조제권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극적인 합의안을 만들어 내면서 사회적으로는 분쟁이 종결된다. 그러나 이 합의안을 각 집단이 추인받는 과정에서 약사회에 의해 최종적으로는 파기되지만, 그해 정기국회에서 이 중재안을 골격으로 하여 약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분쟁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이 중재안의 요점은 한약사 제도를 두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약사들은 한약사 시험을 보아야 했고, 일부 대학에는 한약학과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한약사 제도라는 것이 그리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절충안이 우리 의료 체계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분쟁이 정리되었다는 것 때문에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약 분쟁은 이처럼 우리나라 의료 체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급속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다양한 이익집단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급속한 성장의 과정에서 동시에 성장한 이익집단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예측도 없었고 또한 이익집단 상호 간의 갈등과 분쟁에 대한 합리적인 사회적 규칙을 형성할 여유를 사회가 갖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한약 분쟁은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 간의 분쟁이 사회갈등의 주요한 모습이 될 것임을 예고한 셈이기도 하다. 당시 한약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약업사는 한약업사대로, 침구사는 침구사대로, 슈퍼마켓연합회는 슈퍼마켓연합회대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실제 그 이후에도 이익집단 간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합리적 절차가 없었고 한약 분쟁을 계기로 이런 절차의 필요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요구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대책 없이 지나다 2001년에는 의약분업 때문에 또 다른 홍역을 치러야 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쓰레기 매립지 문제나 방폐장 문제처럼 자치단체와 주민들 간의 갈등과 분쟁이 많아지면서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갈등 관리에 관한 법이 만들어지고 경실련에 갈등조정센터가 생기는 등 제도적, 사회적 노력이 이루어진다.

 

한약 분쟁은 이처럼 몇 가지 의미에서 1980년대의 우리 사회 모습과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