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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1990년대 시민운동, 성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무슨 권한이 있어서 시민단체들이 이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경실련이 무슨 권한으로 한의사회나 약사회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을까? 이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권력이 됐다며, 누가 그런 권한을 시민단체에 위임했느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총선연대 활동을 둘러싼 시민운동 내 논쟁 당시에 심야 토론 같은 TV 토론에서 종종 나오던 질문이기도 했다. 누가 그런 권한을 위임해주었느냐는 질문은 주로 정치인들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치인들의 지적대로 시민단체에 그런 권한을 누구도 위임해준 적은 없다. 시민단체들은 그저 자임했을 뿐이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경제 정의고 사법 정의고 복지이며, 인권의 신장이며 생태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회가 변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임한 것이다.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고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캠페인 하는 과정에 사회적 공감대가 커져서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여론의 크기가 커져 정치나 권력기관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그렇게 자임한 과제들이 1990년대 우리 사회의 변화와 조응한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무엇보다 시민단체들이 1990년대 우리 사회의 변화를 통찰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 1990년대 시민운동 성장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당시의 기사가 이런 상황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경실련이 표방하는 중간층의 지지를 받는 개혁적 시민운동은 주택임대차법 개정과 토지·금융·세제 개혁에 관한 정책 대안의 제시 등 국민의 피부에 닿는 쟁점 부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 왔다. 각종 선거에서 공명선거 캠페인을 주도한 것이나 이문옥 감사관과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을 이끌어 낸 것 등도 경실련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최근에는 부정부패 추방운동본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 운동협의회(정사협), 우리 쌀 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 등과의 폭넓은 연대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시사저널 208).

 

 

앞서 시민단체들이 1990년대에 이룬 성과로 예를 든 사례들은 모두 1980년대에는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들이 아니었다. 1980년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나 생존권투쟁이라 불렀던 노동자나 농민, 빈민들의 요구와 다른 의제들이 1990년대에 나타나게 된다. 우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는 등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구성하게 되면서 정치적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점차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한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개발독재와 함께 성장한 재벌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 규모가 커졌고, 3저 호황이라는 세계시장의 조건이 수출 경제의 규모를 키우면서 다양한 계층적 분화가 생기며 사회가 복잡해졌다는 것도 우리 사회의 요구를 과거와는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하면서 과거와 비교하면 부동산, 교통, 주택,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분쟁, 장애인 문제 등 그동안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의 주요 문제라 여겨지지 않았던 문제들이 사회갈등의 중요한 문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에 이런 변화들이 우리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 놓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보다 우리 사회의 공정성, 투명성, 형평성, 생태적 감수성 등의 가치에 기반을 둔 의제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인식되었고, 이런 문제들을 주요 과제로 삼는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동 방식의 변화에 있다. 1980년대에는 불법적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폭력을 동원하고 있었기에 그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은 필연적으로 불법적인 방식과 저항적 폭력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일정하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도 했다. ‘삼민투라는 학생운동조직 구성원들이 수배를 당해서 피해 다닐 때 시민들이 숨겨주었다는 일화는 부지기수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에 따라 이런 방식이 더는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는데, 시민운동은 이를 합법적 운동 방식과 정책대안운동, 참여연대가 지평을 연 시민입법운동이라는 방식으로 새 옷을 입고 사회운동의 지평을 넓혀 가게 된 것이다.

 

 

전문가나 시민은 이제 시민단체들을 매개로 자유롭게 그리고 정치적 탄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공론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또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의 성장에 힘입어 스스로 필요한 시민단체들을 만들면서 시민운동의 영향력은 확장되어 갔다. 이 같은 변화를 긍정적이라고 본 언론들의 우호적 태도도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다. 행정부도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를 돕기 위해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시민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 시절 촛불단체들에 대한 지원 폐지 등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조금씩 확대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시민단체들의 대한 적대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명박 정부 초기 정부와 정치권의 시민단체에 대한 압박은 전 방위로 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2008년 촛불 시위 이후 광우병대책회의에 참여한 단체 중 정부 지원을 받던 단체들의 프로젝트 공모 참여도 제한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정부의 각종 민간 위원회에서도 배제되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시민단체 인사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아예 위원회 자체를 가동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독재 정권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정권이 바뀌자 단박에 현실이 되었다.

 

당시는 필자가 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이었는데,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경찰서 정보과 형사를 보게 되었다. 2008년 어느 날 연대회의 사무실에 스스로 정보과 형사라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뭔가 조사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냥 들렀다며 앞으로도 들르겠다는 것이다. 원하는 정보는 웹사이트에 다 있으니 사무실에 찾아오지 말라며 돌려보냈지만, 다시 사찰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009년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국정원의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원은 당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며 국가가 국민들의 비판적 발언을 봉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하튼 국정원은 소송을 통해 이 같은 발언들을 아예 막으려 했지만, 박원순 변호사는 1, 2, 3심 모두 승소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8년 가을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다 동아일보에 단신으로 실린 국회 소식을 보았다. 국회 예결위에서 여야 합의로 시민단체 1,000개를 감사원을 통해 감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정부가 왜 자율적으로 구성되고 활동하는 단체들을 감사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서, 국회 속기록을 구해서 보니 한나라당 이사철 의원이 제기하고 민주당도 합의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정부 지원을 받는 단체들을 다 감사해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사철 의원이 누구인가? 2000년 총선연대 당시 천주교 단체들에 대한 간첩조작사건의 공안 검사로 낙선 대상이 되어 낙선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8년 만에 국회에 복귀해 2000년 총선연대 참여단체 수와 유사한 1,000개의 단체에 대한 감사를 주장한 것이다. 이걸 민주당은 좋다고 합의하고…….

 

정작 감사원이 1,000개를 할 수 없다고 난색을 보이자, 그에 따라 감사 대상을 연간 지원 규모가 수천만 원 이상 되는 단체들로 제한하다 보니 정작 표적으로 삼으려 했던 단체들은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적은 규모여서 대부분 빠지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시민단체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거의 전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이런 태도는 2008, 2009년 내내 시민단체들을 1980년대처럼 연일 집회와 시위에 나서게 했다.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시민단체들까지 정치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것이 이명박 정부이기도 하다. 연일 이어지는 집회나 시위에도 이명박 정부가 별다른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자,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전횡을 막을 수 있나 고민하다 2010년 지방선거라도 야권이 이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0년 야권을 연합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한 희망과 대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해보기로 하겠다.

 

 

어쨌든 잠시 이야기가 엇나갔지만 1990년대의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시민단체들의 활동과 문제 제기가 언론을 통해 확장·증폭되어 의회를 통한 입법적 의제로 발전하면서 시민단체들의 정책 대안들이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확장되어 갔다.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위가 이어지고 집회가 열렸는데 대개는 규탄 시위였고, 그 시위가 커지면 정치적 방식의 해결이 반복되곤 했다. 예를 들어, 이를 제도적으로 근절하기 위해 경실련은 금융실명제를 제안했고, 참여연대는 부패방지법을 제안했다. 둘 다 입법 과정을 거쳐 제도로 정착되었다.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질서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활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1990년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통찰과 그에 따른 운동방식의 변화 때문이었다.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읽어 내고 아무도 걷지 않았던 곳에 새 길을 내었고, 그 새 길을 걷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면서 사회적 영향력은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