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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1990년대의 시민운동

 

 

 

 

2004년이 지나면서 1990년대에 성장한 시민운동을, 특히 중요하게 드러나는 키워드로 개인이나 네트워크, 지역을 가지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들에는 이런 키워드들이 그리 잘 작동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전히 집단이 중요하고 단체의 독자적인 활동이 부각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지역 활동의 경우에 소위 중앙이라는 불리는 서울 주요 단체들 활동의 복사판에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스럽지만 발견했던 것이다.

 

어쩌면 조직이라는 단체의 중요성이 개인의 주체성이나 개성을 잘 살려내지 못하는 일은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곳이라면 작든 크든 있게 마련인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개개인이 얼마든지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과 비교하면, 느리고 경직적인 활동 방식으로 인해 구성원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배제할 수 없다.

 

 

시민단체들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체를 구성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총선연대이고 상시적인 연대를 위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같은 기구도 만들어져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서 성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연대 기구에 속한 개별 단체들의 활동은 묻히게 되는 단점도 있다. 2000년대 초반에 필자는 단체라는 이름의 단체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개별 단체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 주고자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잘 알려지고 규모가 큰 시민단체들이 하지 않는 의제들을 자신의 목표로 하는 작은 단체들이 여러 단체와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종 연대체 구성을 제안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구성된 연대 기구를 대표하는 것은 실제 일을 기획한 단체가 되어야 할 텐데, 대개 알려지기는 연대체에 참여한 주요한 단체들이 되는 일이 많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으로 보도되고 표현되면서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만들어 낸 단체는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로 2001년에 환경정의라는 단체가 용인의 대지산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나무 위에 올라가 저항하는 등 사회적 이목을 끌고 나름 성과를 냈던 일이 있다. 아파트 건설로 사라져 가는 도시의 야산들이 주는 생태적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준 이 운동은 주요 방송의 9시 뉴스나 각종 시사 프로그램 등에 자세히 소개되었고, 공감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대지산을 살려내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해 말 시민의신문조사에 따르면 용인 대지산 살리기 운동을 한 단체는 어디냐는 질문에 환경운동연합이라고 답한 사람이 제일 많고, 녹색연합이라고 답한 사람이 그다음이었다. 그 두 단체는 사실 대지산 살리기 운동에는 참여치 않았다.

 

이처럼 작은 단체들이 이루어내는 개별적 성과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기 에 그 단체들의 활동이 잘 부각되어야 마땅하지만, 언제나 이라는 이름 뒤에 한 무더기로 취급되어 그들의 활동은 가려지기에 십상이었다. 물론 큰 단체들이 의도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언론을 매개로 형성된 우리 사회의 인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게 시민운동은 잘 알려진 단체들이 대부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체 내부로 들어와 알게 모르게 조직을 앞세우다 보면 조직 구성원 개인의 활동은 집단이라는 이름에 묻히기 쉽고, 내부의 민주주의가 유보되고 있다는 생각과 권위주의적 문화가 개인의 창의적 활동과 부딪히게 마련이다. 최근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개별 활동가들이 시민운동플랜B’라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에 올라오는 고뇌와 고민 중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시민단체의 내부의 문화가 새로운 청년 세대의 결합마저 쉽지 않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승우, 활동가는 보이지 않고 실무자로 버티는 운동, http://nowplanb.kr/181)

 

 

젊은 세대들은 이런 권위적 문화에 익숙지 않고, 개인의 활동이 자기실현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조직에서 보내려 하지도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젊은 활동가들이 시민단체에 오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민단체의 바깥으로는 단체로 표현되는 네트워크 혹은 연대 활동에서 개별 단체들의 창의성이나 주도성이 그리 잘 드러나지 않고, 단체 내부로 보면 활동가 개인의 전망과 비전을 압도하는 권위주의적 문화가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누르고 있는 셈이다.

 

지역으로 가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석사 논문을 쓰느라 조사하면서 발견한 것 중의 하나가 서울의 주요 단체들이 벌리고 있는 활동이나 사업이 그대로 지역 단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 서울의 단체들은 중앙정부를 상대로 하는 활동이 많아서 캠페인이나 사업이 전국적 의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개 지역의 단체들이 이 이름 그대로 지역 본부라고만 붙여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 물론 그 일도 어떤 경우엔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역의 독자적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앙 단체들의 활동을 대신해 준다는 느낌 외에는 지역 주민들이 다른 점들을 느끼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아래 표는 참여연대의 경우인데, 중앙 조직의 사업과 지역 조직의 사업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점차 지역 조직들은 지역의 독자적 사업 영역을 발전시켜 가기 시작한다.)

 

 

참여연대 사업 분야

대구 참여연대

부산 참여자치시민연대

경제개혁센터

사법감시센터

의정감시센터

조세개혁센터

평화군축센터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사회복지위원회

국제연대위원회

참여사회연구소

공익법센터

시정개혁센터

사회복지위원회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주민자치운동센터

시정의정감시센터

정치행정위원회

사회복지보건위원회

녹색교통위원회

문화환경위원회

도시환경위원회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아파트공동체운동본부

 

참여연대 중앙과 지역 조직 구성 비교

(90년대중앙집중형시민운동의 한계와 변화에 대한 연구, 2006, 하승창 에서 재인용)

 

 

이렇게 보면 소위 중앙의 주요 몇몇 단체가 중심이 된 소수의 운동이라는 느낌, 전체를 대표하는 몇몇 개인과 단체 뒤에 수많은 개별 단체와 개인이 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숨어 있는 셈이다. 이 대오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조직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규율이 강조되고 이 규율은 일정하게 조직 내부의 권위주의적 문화를 생성하게 마련이다.

 

이런 모습의 시민단체들이 2002년 이후 열린 공간과 열린 소통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개인들과 개인들의 네트워크로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리 없다. 그러다 보니 불과 몇 년 전 시민단체들을 매개로 자신들의 의사와 행동을 표출했던 시민들이 점차 시민단체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셈인데, 시민단체들은 이런 변화에 심각하게 조응하지 못했다.

 

2004오마이뉴스에 앞서 소개한 기고를 하고 난 후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열 대표의 초대로 당시 시민단체들의 주요 리더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배 그룹들이 후배들과 함께 시민운동의 미래를 놓고 이야기해보자고 하여 원주 어딘가로 워크숍을 떠난 적이 있다. 필자는 앞서 소개한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향후 시민운동의 비전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다. 향후 시민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할 방향으로 첫째, 1990년대의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의 투명성과 형평성, 공정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고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사회적 규칙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해왔다면 이제 시민운동에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새로운 사회 변화에 조응하는 의제들을 제기하고 공동체의 가치 지향을 만들어 나가며, 새로운 사회적 규칙과 문화로 만들어가는 숙제를 마주하고 있으므로 생태나 인권, , 빈곤, 노동, 평화 등보다 가치 지향적인 의제들이 운동의 비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체로 이에 대한 생각들은 크게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많았던 것은 운동 방식의 변화에 관한 지점이었다. 필자는

 

 

‘1980년대 대중운동이 노동조합과 농민단체들을 매개로 집단의 위력과 군중 동원이라는 전술을 택해 왔고, 1990년대 시민운동이 수십 개, 수백 개씩의 단체 연명으로 단체를 동원하는 전술로 대중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두 양식이 그간 공존해왔다면 이 같은 동원 전략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적 방식이란 결국 수많은 개인과 서클, 구체적 의제에 동의하는 개인과 서클의 자발적 참여라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아마도 운동 방식은 이렇게 변화할 것이며 이는 운동가 개인의 존재 방식도 바꾸어놓게 될 것이다.

 

특별히 조직과 집단에 종속적 지위를 갖지 않는, 한 조직에 풀타임 근무를 하면서도 다른 여러 조직과 서클에 관여하고 일하는 모습을 아마도 흔히 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어느 조직에도 풀타임 근무를 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단체에서 적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도 보게 될 것이다.

 

규모가 작은 단체들은 이미 이 같은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단체의 엄밀한 정체성으로 개인을 가두어 두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의적으로 일하며 어디에 속하든 관계없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우선인 자유인들의 모습으로 운동가는 거듭날 것이다.

(변화의 여울 앞에 선 시민운동, 2004, 하승창, 오마이뉴스).

 

라고 했지만, 이는 너무 급진적 변화에 대한 예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나는 시민운동이 변하기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서로 다른 몫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기존에 성장한 단체들은 그 단체들대로, 이제 새롭게 성장하는 운동은 그 운동대로 다른 몫을 감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