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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최승아|오, 이런! 이란!

테헤란 택시 블루스

 

 

 

 

 

회사 다니던 시절, 거의 매일 밤 똑같은 이란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인이면 좋았겠지만, 콜택시 회사였다.

 

옉 턱시 바러예 조르단 미커스탐.(조르단 가는 택시 한 대 부탁합니다)”

 

야근을 하다 보면 곧 밤이 됐다. 회사에서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테헤란이든 서울이든 밤에 혼자 다니면 불안한 법. 무조건 콜택시를 불렀다. 출근할 땐 퇴근할 때와 달리 택시를 두 번이나 탔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출근 길 아침, 집 앞 큰 도로에 서 있으면 낡은 차들이 다가와 창문을 스르르 열었다.

 

모스타킴?”

 

이렇게 묻고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난 그 즉시 차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회사 방향으로 꺾어지는 모퉁이까지 내려간 뒤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매일 출근길이 이런 식이었다.

 

 

 

모스타킴(mostaqim)은 택시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같을 때 동승하는 일종의 합승 택시 개념이다. ‘모스타킴은 페르시아어로 직진이라는 뜻인데, 택시 종류라기보다 탑승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모스타킴 택시는 사람을 계속 채우며 가는 탓에 손님들이 끊임없이 타고 내린다. 택시 값도 무척 싸다. 웬만한 거리는 한국 돈으로 1,000원도 되지 않았다.

 

이란 택시는 어전스(agence)’라고 불리는 콜택시, ‘다르바스트 (darbast)라고 불리는 개인택시 그리고 보통 택시로 불리는 왕복택시 이 3종류가 있는데, 콜택시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택시 모두 모스타킴이 가능하다. 일반 차량도 본인이 내키면 모스타킴을 해 용돈벌이를 하는데 여기에 택시 기사들도 별 불만이 없는 모양이다. 테헤란은 워낙 택시 이용률이 높아 손님이 많기 때문이란다. 고로 목적지 방향만 알면 도로에 가득한 모스타킴 택시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셈이다. 그것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이란 도시들은 거의 다 비슷한 상황이다.

 

이란 생활 초기, 급할 땐 에라 모르겠다 하며 다르바스트를 타기도 했다. 원하는 목적지 코앞까지 한 번에 가려면 어전스나 다르바스트를 타야한다. ‘다르바스트는 문이라는 뜻의 다르와 닫힌이라는 뜻의 바스트를 합친 닫힌 문이라는 뜻으로, 손님이 타면 더 이상 다른 손님을 태우지 않고, 바로 목적지로 간다. 당연히 택시비는 모스타킴과 왕복택시보다 비싸다. 마지막으로 왕복택시는 같은 구간을 셔틀버스처럼 왕복하는 택시로, 사람이 많은 광장과 광장, 다리와 광장, 주요 도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모스타킴 택시처럼 손님을 한꺼번에 실어 나르는데 유동인구가 많은 바낙 광장엔 아예 왕복택시 전용 승강장까지 있다. 5인용 노란색, 녹색 택시, 11인승 녹색 벤이 이곳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이란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도 지하철도 아닌, 바로 이 택시다. 테헤란 같은 대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버스와 지하철이 거대한 테헤란 전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데 비해 택시는 종류도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이용이 가능해 편리하기 때문이다. 큰 결심을 해야 택시를 타는 한국과 달리, 이란은 마음 편히 택시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그야말로 택시 파라다이스였다.

 

 

 이란의 노란 택시와 프라이드 택시가 쉬라즈 카림칸 성 앞 광장을 오간다. 택시의 차체가 약하니 문을 살살 닫아야 한다.

 

 

그러나 지상 위에 완벽한 천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날, 홀로 출근 중이던 난 그날따라 유난히 모스타킴 택시가 잡히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갑자기 흰 푸조 한 대가 내 앞에 서는 게 아닌가. 가만 보니 모스타킴 택시가 돼 준다는 것 같았다.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급한 마음에 얼른 올라탔다.

 

철컥.”

 

타자마자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금방 내릴 텐데 문을 왜 잠그지?’

 

그제야 조심스레 차 주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기름진 장발에 흰 얼굴, 비대한 턱살을 가진 뚱뚱한 이란 남자였다. 그는 뒷거울로 느끼한 눈빛을 흘리며 내게 묻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에요?”

 

몇 살이에요?”

 

그의 질문에 처음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내 바지 밑단을 파고들어 종아리를 만지는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연신 바지 밑단을 내렸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때의 기억은 몇 가지 장면으로만 남아 있다. 특히 내가 앙탈부린다는 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지나가다 굳이 모르는 외국인 여성을 태워준다는 건 선의보다는 다른 흑심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고로, 만약 혼자 택시를 타야 할 경우 웬만하면 탑승자가 있는 차 혹은 공인 택시를 타는 게 좋다. 모든 이란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으니 말이다.

 

 

 

잊을 수 없는 모스타킴 사건 이후, 개인택시 기사들의 택시비 횡포경험까지 겹쳐 이란 택시에 좀처럼 정을 붙이기 힘들었다. 더불어 택시가 발 딛고 서있는 테헤란은, 그야말로 교통지옥이었다.

 

테헤란의 수많은 도로와 도로를 잇는 광장은 연일 크고 작은 차들로 꽉 차 있었다. 통계를 보니, 테헤란 차 수용량의 5배가 넘는 400만대의 차가 테헤란을 활보하고 있단다. 이란이 산유국(석유 매장량으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 5, 중동에선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이다.)이라 기름 값이 싼 탓에 너도 나도 차를 몰기 때문이다. 전 세계 평균 5명당 1대의 차량을 갖고 있다면, 이란은 3명당 1대에 달하는 수준이란다. 테헤란의 악명 높은 대기오염도 이 때문이었다.

 

빵빵.”

 

무법천지 테헤란 거리는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카오스에 가까웠다. 카오스 속 운전자들의 운전 기술 또한 기가 막혔다. 앞차와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유지하며 끼어드는 기술은 거의 곡예 수준이었다. 중앙선을 침범해 달리는 통해 2차로가 순식간에 1차로가 되기도, 1차선로가 순식간에 2차로가 되기도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역시 별로 고려 안하는 모양새였다. 이란의 그 유명한 터로프 문화(체면 문화)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도로에서 만큼은 터로프 문화도 예외인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러 20108, 이란에 온 지 9개월 만에 잠시 한국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공항버스에 올라타 오랜만에 한국 거리를 바라보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 이렇게 거리가 깔끔했었나?’ 한국 차들은 기름을 두른 듯 윤기나 보였고 운전도 너무나 얌전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 있을 땐 그 풍경이 참 복잡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내 눈은 테헤란 거리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 서서히 교통지옥, 테헤란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난 나름의 택시 사용법까지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기숙사로 이사 온 이후 난 콜택시와는 이별을 선언했고, 다르바스트 택시는 절대 타지 않았다. 왕복택시와 모스타킴만 주로 이용했다. 이 두 택시의 저렴한 가격을 경험하면 다르바스트와의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테헤란의 주요 건물들은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모스타킴과 왕복택시만 이용해도 어디든 갈 수 있다. 목적지 인근 광장까지 왕복택시를 타고 가서, 다시 목적지 방향 모스타킴 택시를 타면 되니까.

 

메이두네 바낙.(바낙 광장이요)”

 

기숙사가 있는 토히드 광장 도로가엔 매일 한두 대의 왕복택시와 호객 담당 아저씨가 서 있었다. 날 양곰(대장금의 페르시아어 발음)이라 부르던 호객담당 아저씨는 늘 검은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바낙! 바낙하고 외쳐댔다. 택시에 타더라도 앉아서 조금 기다려야했는데, 이는 수용인원 4명이 다 찬 후에야 택시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대기 택시 외에 달려오는 왕복택시를 잡는 건 약간의 기술이 필요했다. 주요 광장, 다리, 도로 주위에 서 있으면 택시가 알아서 다가오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지만 단, 차가 오면 창문에 대고 목적지를 크고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도로가 워낙 시끄럽기 때문이다. “바나!” 이때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차안으로 몸을 던지고, 고개를 살짝 꺾으면 아니라는 표시니 다른 차를 기다렸다. 이 과정은 한국에서 택시를 잡을 때보다 약 1.5배의 속도로 빠르게 이뤄지는 터라 재빨리 몸을 움직여야 했다.

 

덧붙여 어떤 이란 택시를 타든 주의해야할 점도 발견했다. 반드시 차문을 살살 닫아야 한다는 것. 택시로 주로 쓰는 1960년대 산 페이칸, 이란 산 푸조와 프라이드(부품을 수입해 이란에서 조립한다)는 차체가 약한 탓에 문을 닫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식으로 차문을 꽝 닫으면? 기사 아저씨의 굳은 표정과 함께 문 좀 살살 닫으세요!”라는 비명을 듣곤 했다.

 

 

 테헤란로를 꽉 메운 차들.

 

 

한 나라의 도로풍경은 의상이나 음식처럼 그 나라를 읽는 창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란의 경우, 산유국이 아니었다면 버스와 지하철보다 택시가 발달하긴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반면 앞서 말했듯 이란의 교통문화에서 이란 고유의 체면문화, 일명 터로프 문화의 흔적을 찾기란 힘들었다. 체면은커녕 이란 도로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 아닌가?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란 사회에 터로프 문화가 워낙 공고한 탓에 오히려 숨겨져 있던 개인주의가 작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로 위는 차 안에 타는 순간 익명성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공간이니 말이다. 만약 정부가 교통법규 위반 시 직장에 사진을 내 걸겠다고 공표한다면 테헤란 도로 풍경은 좀 달라질지도 모른다. 교통법규를 위반한다는 건 그 즉시 주변 사람들에게 체면을 잃는다는 뜻이 될 테니까.

 

아무튼 나로선, 테헤란 도로풍경의 사회문화적인 이유까지 알 길은 없었다. 분명했던 건 그곳은 더 빨리 가고 싶은 욕망이 충돌하는, 혼란 그 자체였다는 사실 밖에. 고로, 현장이 변하지 않으니 내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테헤란의 교통문화에 적응하고 택시의 용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왜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어디에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무법천지 택시문화에 익숙해지고 불만이 걷히고 나니, 그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행복은 택시를 타고도 온다! 토히드 광장에서 북쪽 타지리시 광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이 말을 떠올리게 했다. 타지리시 행 왕복 택시는 밀리는 법 없는 참런(chamran) 고속도로를 쭉쭉 내달리곤 했다. 부르릉! 택시가 출발하면 나도 얼른 좋아하는 노래를 귓가에 흘리고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엄청난 바람에 히잡이 벗겨지고 또 벗겨져도 행복했다. 행복감은 사실 돈 때문이기도 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이렇게 시원하게 도로를 달릴 수 있다니!

 

택시 자체도 참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택시는 이란 대중교통 수단 중에서 남녀 구분탑승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이란의 버스와 지하철은 각각 분리대와 구분칸으로 남녀 탑승 구역이 구분돼 있는데(지하철의 경우 남녀가 같이 타지만, 여성전용칸이 별도로 있다) 택시 안엔 분리대, 구분칸이 없었다. 버스와 지하철의 구분 탑승을 비웃듯, 이란 남녀들은 차 안에서 보란 듯이 어깨를 스치며 앉아 있었다. 더불어 왕복택시는 수없이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통에 이방인에게 말 걸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택시 기사와 손님들의 대화를 통해 이란의 내밀한 현실을 엿볼 수도 있었다. 이 뿐인가. 정확한 택시비 가격도 동승객들의 손짓만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하철 여성전용칸의 모습

 

 

버스 안에 설치된 분리대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고 있는 연인

 

 

돌이켜보면 테헤란의 택시 문화는 마치 외국어 같았다. 언어를 모르는 초기엔 혼란스럽지만 단어와 문장을 배울수록 그 언어를 쓰는 공간에 대한 감이 잡혀간다. 언어에 능통하게 된 후엔? 속어나 은어 섞어 쓰듯 그 세계를 즐기게 된다.

 

고로 내 '택시 분투기'의 결론은 이렇다. 누구든지 무법천지 테헤란 택시의 고유한 용법을 터득하고 익숙해지면 그 땐 즐기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 어디에도 없는 테헤란판 택시 블루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