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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최승아|오, 이런! 이란!

차이(Chai)는 힘이 세다

 

 

 

 

나는 붉은색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넌 사주에 불()이 없대. 그래서 붉은 색을 많이 입는 게 좋다더라.” 엄마에게 이 말을 들은 뒤로 그랬다. 그때부터 난 속옷부터 상의, 필통, 휴대전화 케이스, 지갑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붉은색 계열로 구입하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란에 가선 몸속까지 붉은색으로 채우기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란의 국민음료, ‘차이(chai, 홍차)’로 말이다.

 

이 붉은 물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다. 차이를 좋아하기까지는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2010년 엄청난 업무에 시달리던 어느 날, 동료 파라허니가 나에게 느닷없이 차이를 권했다.

 

승아. 너도 차이를 마셔봐. 소화가 잘돼.”

 

안 그래도 업무 스트레스에 힘없는 트림을 반복하던 차에 귀가 번쩍 띄었다.

 

정말요?”

 

. 진짜야.”

 

파라허니는 퉁퉁한 손으로 굵은 목부터 가슴팍을 거쳐 배 아래까지 일직선을 그리며 말했다. “차이가 이렇게 흘러가면서 몸속을 정화시켜주기 때문이야.”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았다.

 

그런데 차이를 즐겨먹는 사람은 파라허니뿐이 아니었다. 이란인 동료 대부분은 커피 대신 차이를 마시고 있었다. 특히 파라허니는 불룩한 배를 내밀곤 연신 꿀꺽꿀꺽 차이를 마셔댔다. 그는 아침마다 맥주잔 같은 컵에 차이를 한가득 따라와 옆에 놓고 십여 개의 액셀 창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왼손으로 턱을 괴고 줄곧 차이를 마셨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차이로 정화해야 할 곳은 불룩한 배보다는 머리, 원형탈모가 진행 중이던 복잡한 머리 같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커피가 다 떨어지자 나는 파라허니의 조언을 떠올리며 차이를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회사 부엌에는 늘 차이 원액을 끓여놓은 주전자와 뜨거운 물이 그득히 담긴 전기 포트가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차이 원액에 물을 섞어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내가 알 턱이 있나. 바보처럼 난 차이 원액만 쪼르륵 따라 마시고 말았다. 당연히 원액의 맛은 엄청나게 썼고, 이 날 이후 난 차이에 대한 편견만 키운 채 그렇게 차이와 멀어져 갔다.

 

 

내가 어떻게 차이를 즐겨마시게 됐는지 이야기하기 전, 잠깐 차이에 대해 알아보자. 차이는 앞서 말했듯이 이란의 국민음료다. 이란사람들은 일어나서 한 잔, 식후 한 잔, 자기 전에 한 잔, 손님 오면 한 잔……, 그러니까 하루 종일 마신다. 무더운 여름에도 한결같이 뜨거운 차를 마실 정도니, 말 다했다.

 

이란에서 차이의 역사는 15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처음 수입됐다. 그 뒤 사람들이 점차 차이의 매력에 빠져 19세기엔 이란에서도 직접 차 묘목을 카스피 해 인근에 심기 시작했다. 현재 이란 최대의 차 생산지 또한 카스피 해 인근 길란 주의 라히잔이라는 곳이다. 이란엔 현재 약 107개의 차 공장과 32천 헥타르에 달하는 차나무 농장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로 차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쉬러즈 시의 바킬 시장에 있는 전통 찻집. 바삭한 식감의 단 과자와 함께 차를 마신다

 

 

차이 먹는 모습은 이란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이란인들은 주로 집 혹은 차이쿠네(찻집)에서 차이를 마신다. 차이쿠네는 카펫 깔린 평상에 앉아 마시는 전통 차이쿠네와 커피숍처럼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현대식 차이쿠네가 있다. 시장 안, 도로변 휴게소, 경치 좋은 강가의 다리 밑, 마을 입구, 공원 등에 위치해 쉽게 찾을 수 있는 편이다. 차이쿠네를 보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란에서 술을 먹을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이 풍경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술이 금지되어 있는 탓에 차이를 더 열심히 마시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마시는 음료로 세계지도를 그린다면 이란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 정도로, 단연 차이 강국이다.

 

 

 

회사를 떠나, 기숙사에서 새 삶을 꾸린 후, 난 이 차이를 마시지 않으려야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온종일 차이를 마셔댔기 때문이다.

 

승아, 차이 마실래?”

 

? .”

 

그런데 처음엔 차이 마시자는 말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차이의 쓴맛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때문이었다. 기숙사 생활 초기, 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방에 있는 걸 더 좋아했다. 친구들이 조금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관심은 때론 심각하게 부담스러웠고 똑똑노크 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역시 혼자가 편해.’ 당연히 말도 잘 안했다. 사실 그때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이란어를 완벽히 배우고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단기간에 목표를 이루려다보니 욕심과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고 마음처럼 몸도 고장이 나 좀처럼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내 몸과 마음은 그렇게 점점 굳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지하 공부방에서 붙잡고 있던 책을 그만 놓아버리고 말았다. 정말 지쳐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 방으로 달려가 카펫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앉아서 그냥 차이를 마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도 무작정 앉아 있었다. “!” 그런데 이게 웬일? 친구들의 웃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게 웃음이 나왔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얼마 뒤, 조용히 앉아 있기가 민망해 농담을 던져보았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민망할 정도로 열렬했다. ‘오와. 반응이 좋네!’

 

자발적으로 참여한 최초의 티타임과 친구들과의 대화. 이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재밌었다. 그 뒤로 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친구들이 부르면 곧장 옆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방에 혼자 있지 않았다.

 

크하. 진짜 맛있다.”

 

매일 적어도 하루에 3번 그리고 기숙사에 머문 게 도합 7개월이니 도대체 난 차이를 얼마나 마신 걸까? 여행 중에도 쉬지 않고 마셨으니, 족히 630(3˟30˟7)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정들면 무섭다더니 점점 난 커피를 멀리하게 되었다. 심지어 커피숍에서도 차이를 시킬 정도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였다. 차이 맛이 변한 건 아닐 테니 변한 건 내 입맛이었다. 아니다. 변한 건 나였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변하게 된 걸까. 반복된 음용으로 차이 맛에 익숙해진 것도 물론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차이의 놀라운 힘을 발견했다는 것.

 

나의 차이쿠네, 기숙사 옆방에서의 티타임은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터헤레가 법전을 베고 누워 치만을 부른다.

 

치만, 우리 차이 마실까?”

 

착한 치만은 보고 있으면 안타까울 정도로 남의 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알겠어.”

 

치만이 꽃무늬 잠옷바지 차림으로 부엌으로 간다. 얼마 뒤, 그녀가 뜨거운 물이 담긴, 검게 그을린 철제주전자와 찻물이 담긴 조그만 주전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다. 보통 이때까지도 터헤레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치만이 돌아오면 터헤레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정말 수고했어, 치만.”

 

돌아가면서 차이를 만들었지만 치만의 기술은 단연 최고였다. 치만이 투명한 컵에 찻물을 따르고 뜨거운 물을 붓는 모습은 각각의 행동이 매 순간 완전함을 갖추고 있었고 이는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오호, 꼬마 때부터 주전자를 돌리던 치만의 몸놀림이란.

 

 

진하게 우려낸 홍차에 물을 붓는다. 차이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던 쿠르드족 친구 치만과 함께 소풍 갔던 날.

 

 

기숙사에서는 큰 철제주전자로 물을 끓였지만, 대부분의 이란 가정집에서는 사모바르라는 거대한 꽃병 모양의 주전자(전기, 기름, 천연가스식 등 종류가 다양하다)를 사용한다. 차이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우선 사모바르로 물을 팔팔 끓인 뒤 끓인 물을 찻잎이 담긴 찻주전자에 붓는다. 그 다음 찻주전자를 사모바르 위에 올려놓고 찻물을 우려낸다. 사모바르 안에서 물이 끓으며 발생하는 증기가 찻물을 우리는 역할을 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야 차가 맛있고 차의 열기도 오래간단다. 찻물이 잘 우러나면 투명한 컵에 찻물을 붓고, 사모바르 안의 뜨거운 물을 부어 농도를 맞춘 뒤 마시면 된다. 보통 투명한 컵에 차이를 따라 마시는데 차이 만드는 사람이 차이의 남은 양과 (맛을 결정하는) 차이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만, , 터헤레 이렇게 셋으로 시작한 티타임은 보통 아이들이 빈 컵을 들고 몰려오는 통에 금세 판이 커지곤 했다. 차이를 먹는 방법은 이랬다. 우선 손가락 끝으로 흰 각설탕을 앞 이빨 사이에 살포시 끼운다. 찰랑이는 붉은 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설탕이 찻물에 녹으면 달큰하고 향긋한 차이가 입 안을 맴돈 후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려간다. 가슴팍까지 찻물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제 남은 건? 푸짐한 수다 한판. 그랬다. 차이의 붉은 물이 찰랑이면 우리의 시공간도 함께 찰랑였다.

 

차이가 데려다준 곳은 드넓었다. “너 섹스 해봤어?” 수위 낮은 음담패설부터 쇼핑, 연애, 그리고 고국의 현실과 나름의 고담준론까지, 대화의 주제는 시공간 그리고 각 분야를 종횡무진 했다. 당연히 뒷담화와 욕설은 기본이었고. 생각나는 게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한 가지. “미커 멧 사기( سگی میخوامت , 직역하면 "개처럼 널 원해"로 의역하면 당신이 너무 좋다는 뜻이다)" 나중에 이란인에게 이 말을 써 먹으니 고국의 동포를 보는 듯 어찌나 날 감동적으로 쳐다보던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차이를 마신지 어언 3개월이 지나자 나도 차이를 제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차 제조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물을 끓이고 붓는 단순한 차원의 노동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친구들이 매일 마시는 차이를 내게 맡겼다는 건 내가 만든 차이 맛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의미였고, 무엇보다도 나를 차이 네트워크의 구성원으로 인정했다는 거였다. 물론 본인들이 귀찮아서 나를 시킨 적도 많았지만.

 

소화가 잘 되고 몸을 정화시켜준다는 파라허니의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차이 맛과 친구들과의 수다에 맛 들여 내가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갔다. 페르시아어 공부는? 말할 것도 없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내 어휘력은 늘어갔고, 덤으로 비속어들도 내 머릿속에 쌓여갔다. 즐겁게 먹고 마시다 보니 소화도 잘 됐고. 건강해진 몸과 함께 마음도 조금씩 열려갔다.

 

 

   

'호르머'라고 부르는 대추야자 열매(왼쪽). 이란 사람들이 차와 함께 즐겨 먹는다. 그밖에도 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간식거리가 있다(오른쪽).

 

 

생각건대, 나만 바라보느라 막혀버린 몸과 마음이 차이를 마시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와중에 시원하게 뚫려버린 게 아닐까.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다보면 막힌 기운은 저절로 통하게 돼 있단다. 그러고 보면 파라허니의 말은 차이 자체의 효과라기보다는, 차이에 티푸드(tea food)처럼 따라붙는 사람과 이야기와 웃음의 힘이었다. 각설탕보다 더 달콤하고 견과류보다 더 고소한.

 

 

즉불통 통즉불통(通卽不痛 痛卽不通)이라는 말이 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아프면 통하지 않다라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다. 차즉불통 통즉불차(茶卽不痛 痛卽不茶). 이란에서 차이를 마시면 아프지 않고 아프면 차이를 마시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이란에서는 정말 그렇다.

 

이란의 경제, 산업, 예술의 기저에는 매일 오고가는 수천만 잔의 차이가 숨어 있다. 어찌 보면 이란을 움직이는 건 이란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흐르는 붉은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란 사람들은 매일 차이를 마시며 일하고 이야기하고 살아가니 말이다(문득 매일 과다업무로 고생하던 파라허니 생각이 난다.).

 

알고 보니 이국적으로 보이던 차이는 그냥 평범한 액체가 아니었다.

 

 

그렇다. 홍차, 아니 차이는 힘이 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