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쓴 여행기만큼 재미없는 글이 있을까. 여행은 감각의 세계다.
내 입에 들어가지 않는 그곳의 음식, 내 뺨에 불어오지 않는 그곳의 바람,
내 손으로 만지지 못한 그곳의 이야기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행의 깨알 자랑은 일상에 존엄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들 뿐이다.
여기서 그럴 필요가 없지.
대신, 다 놓고 떠난 여행이 과연 일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를 말해 보고 싶다.
알량한 월급 따위 받지 않아도 살 것처럼,
세기의 자유인처럼 호기롭게 떠난 동안 남은 것은 무엇인가.
혹자들은 묻는다. 이렇게 돌아올 것을 왜 떠났냐고.
그렇다. 결과는 차이가 없다.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같은 마을버스를 갈아타 같은 골목길을 걸어 출근을 한다.
똑같이 회의를 하고 원고를 보고 마감을 한다.
그런데 뭔가 좀 다르다.
떠나보니 알 게 된 것 중 첫 번째는 인생이 생각만큼 의미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1000킬로미터의 도보 여행 코스에 올라 광활한 자연 속을 맨몸으로 걷다 보면
아삼삼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흔한 여행기에서 본 사진들처럼
영성이 가득한 고행자가 되어 인간과 신의 경지를 넘나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티아고는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할 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그리고 나란 여자, 생각만큼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매일 밤 베드벅(침대에 사는 빈대들)에 물리다 새벽길을 나서면
온몸이 가려운 가운데 하루하루 걸어내야 할 길들만 숙제처럼 펼쳐져 있었다.
걷다가 기운이 없어지면 저절로 알콜에 손을 댔으며,
그러고도 자주 길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너무 자주 배가 고팠고, 또 너무 자주 배가 아파 풀숲으로 기어들어갔으며
하도 걸어서 양말 밑바닥에 빵구가 나는 것은 애교에다
(무좀 양말은 물집 차단용. 무좀은 없어요)
신발끈이 터져버리는가 하면
일주일 내내 비싸다구를 맞고 걷다가 벼락이 눈앞에 내리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의미의 세계를 찾아 떠난 길 위에는 온갖 감각만 드글드글할 뿐이었고,
나는 그 감각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허덕거렸으며
점점 ‘인생의 의미 따위 개나 줘버려. 오늘은 제발 벼락만 떨어지지 말았으면.’ 하고 빌게 되었다.
여행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몸의 감각을 열어 주는 것.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로바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서서히 관념이 아닌 실체의 세계로 발을 옮기게 되는 것.
이 방식을 일상에 적용시키면 오늘의 삶도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떠나서 해결된 것은 없었으나,
떠나보니 알게 된 툴을 가지고 일상을 더 만끽할 수는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이곳은 변함이 없으나 다르다.
산티아고의 의미는 그 길이 다 끝난 뒤에야 서서히 나에게 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자주 의미를 찾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지금의 인생.
하지만 애써 찾아놓은 의미를 향해 우리는 또 되묻지 않는가.
그게 진정한 의미이냐고.
너무 자주 의미를 묻지 말자.
사실 의미는 형체가 없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조형물 같은 게 아닌가.
깎고 다듬는 동안은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 의미는 나중에야 생긴다.
그 사이에는 감각의 세계에 몸을 담그는 거다.
실체가 있는 것을 따라가며, 주어지는 상황과 문제, 고통과 즐거움들을 좍좍 빨아들이는 것.
마치 여행지에서 그러하듯 매일 온몸을 열고, 감각을 가동해서 일상을 살자는 것.
흠씬 감각의 세상에서 웃고 울고 걸으며 뒹군 뒤에야 희미하게 오는 어떤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
떠나보니 알게 된 첫 번째 팁이다.
_박과장(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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