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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면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면

 

플라톤의 저서 『국가』 2권이 소개하는, 옛 리디아의 양치기가 얻은 반지에 관한 이야기다.

 

양치기가 양떼를 돌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동굴과 같은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벌어진 땅속으로 들어가 양치기는 썩은 송장의 손가락에 끼워진 황금반지를 발견한다. 양치기는 그 반지를 끼고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 반지의 보석을 돌렸더니 자기 몸이 사라져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보석을 반대로 돌리니 몸이 다시 나타났다. 반지의 비밀을 안 양치기는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죽인 후 왕국을 장악한다. 이 양치기가 리디아 사람 기게스의 조상이다. 플라톤은 그가 낀 반지를 ‘기게스의 반지’라고 부른다.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기게스의 반지만 우리의 손에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시 말해 우리가 투명인간이 된다면 어떤 미래가 전개될까. 우리의 미래는 선한 방향으로 전개될까, 아니면 나쁜 방향으로 전개될까.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게 될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행이라도 불사하게 될까. 모르긴 해도 기게스의 반지는 후자 쪽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몰고 갈 위험성이 크다.(감독관이 없는 시험, 판매원이 없는 명품관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곧 자신을 감시하는 눈, 양심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할 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이 없을 때, 욕망은 음흉하게 타오른다. 도둑들이 밤에 활동하는 것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밤이라는 시공간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우범지대라고 부르는 곳도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으슥한 곳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없으면 우리는 대범해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멈칫한다. 과연 이런 행동을 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양심이라는 내면의 감시카메라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이 보고 있지 않아도, 즉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속에 장착된 감시카메라, 곧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기에 어떤 행동이라도 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행동을 해도 되겠는가, 너는 당당한가, 바로 이 내면의 목소리가 양심이다. 이 양심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목소리가 작은 사람도 있다. 어떤 때는 이 양심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만 욕망이 과도해지면 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모든 죄는 이 목소리가 약해질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

 윤동주의 시, <간>이라는 작품을 보자.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이 시에서 윤동주는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 너는 살찌고 /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노래하고 있다. 내가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나의 욕망을 채우려 할 때, 다시 말해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는 ’용궁의 유혹‘에 떨어지려 할 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 곧 양심이 독수리다. 그 독수리가 강하다면, 다시 말해 양심이 강하다면 우리는 절대로 ’용궁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는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자신의 양심, 내 안의 독수리가 강성해질 원했다. 스스로의 양심이 더욱 크고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 바로 그것이 윤동주 시인의 도덕적 순결성이다. 그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교회의 장로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의 도덕적 순결성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집작할 수 있윽 것이다.

 

방황할 때, 괴로울 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접어 버리고 오직 감정에 자신의 행동을 맡기고 싶을 때, 우리는 양심이 부담스럽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도망가고 싶다. 내면에 장착된 감시카메라가 있다면 그것을 꺼버리고 싶다. 그럴 때, 기게스의 반지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전등의 스위치를 눌러 꺼버리듯 그렇게 쉽게 작동을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영국 뉴캐슬대 멜리사 베이트슨 박사는 휴게실의 무인 커피 판매대를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 늘 동전통에 있는 돈이 팔린 커피보다 적었다. 남이 보지 않을 때 그냥 커피를 빼가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박사는 문제 해결을 고민하다 묘안을 생각해냈다. 커피 판매대 앞의 요금표에 사람의 눈동자 사진을 붙인 것이다. 그랬더니 동전통에 들어오는 돈이 평소의 2.76배로 뛰어올랐다. 사람의 눈동자 대신 꽃사진을 붙였을 때는 액수의 변화가 없었다.

베이트슨 박사는 인간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때는 개인의 이해보다 전체를 생각하게 된다며 사이언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범지대에 감시카메라 마크를 붙이는 것보다 사람의 눈동자 사진을 붙이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눈동자 사진은 곧 타인의 시선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를 도덕성으로 이끈다. 그러나 누군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자기 안의 ‘독수리’, 곡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다.





영화 ‘반지의 제왕’ (사진출처: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