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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시각의 차이는 눈의 해부학적 구조의 차이




시각의 차이는 눈의 해부학적 구조의 차이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본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반사된 빛이 망막에 상으로 맺히는 물리적 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눈과 뇌의 합동작전이다. 망막에 어떤 상이 맺혔다고 해도 그것을 뇌가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뇌가 없으면 사물은 물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망막에 맺혀진 상이 시각신경을 통해 시각을 담당하는 뇌의 중추신경에 전달되는 생리적 작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건강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물리적·생리적 작용에 이상이 없는 눈과 뇌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리적·생리적 작용에 이상이 없는 눈과 뇌를 가지고 동일한 대상을 보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의 시각적 경험이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시각적 경험이 같지 않은 이유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의 구조, 다시 말해 눈의 해부학적 구조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의 예를 들어보자. 같은 피사체를 찍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렌즈의 물리적 구성이 다르면 사진이 달라진다. 렌즈가 다르다는 것은 빛을 받아들이는 민감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빛도 렌즈에 따라 그 빛의 양을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사진도 달라진다. 필름이 빛을 받아들이는 민감도가 달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같은 필름이라도 후지 필름이냐, 혹은 같은 코닥 필름이냐, 필름의 종류에 따라서 그 특성이 모두 틀리기에 이를 일반화시키는 무리겠지만 '코닥은 황색계열의 발색이 좋아서 인물에 좋고, 후지는 녹색계열의 발색이 좋아서 풍경에 좋다'라는 정도로 말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인물이나 풍경도 어떤 제조사의 필름을 쓰느냐에 따라서 사진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렌즈와 필름이 비유하는 바가 무엇일까. 바로 하나의 사태와 상황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의 구조를 의미한다.

한 사람의 감각기관의 해부학적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DNA라고 하는 분자단백질의 구조일 터이고, 모든 사람의 DNA가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의 감각기관에는 미세한 변이와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분자단백질 구조의 상이함이 결국 같은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인식의 차이를 낳는다.

 

그러나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일지라도 그가 어떤 환경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여기서 완벽한 일란성 쌍둥이 한 명을 만드는 ‘사고 실험’을 해보자.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을 한 명 더 만들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와 똑같은 ‘나’가 두 명이 되는 거다. 어제의 내가 그 두 명 중의 한 명이고 오늘의 내가 또 다른 한 명이다. 그 두 명이 같은 물을 마셨다고 하자. 그 물 맛은 같은가? 같을 수가 없다. 분명 다르다. 왜? 경험의 주체인 ‘나’는 동일하지만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면 같은 대상을 경험하고도 그 경험의 내용이 달라진다.

 


같은 눈을 가졌어도 다르게 보는 이유는?

 

가장 이상적인 눈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다. 그러나 사람의 카메라의 눈과 달리 실제를 실제 그대로 보지 못한다. 기계의 눈과 달리 인간의 눈은 착각을 자주 범한다. 실제와는 다르게 느끼는 것을 착각이라고 하고, 착각 중에서도 시각에서 일어나는 것을 착시라고 한다. 같은 선이나 모양이 달리 보이는가 하면 원근감이 생기기도 하고, 주위에 있는 선의 굵기 및 간격에 의해서도 같은 형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착시다.



착시 중에 ‘뮐러-라이어 착시, Müller-Lyer illusion’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 똑같은 길이의 두 선분이 끝에 추가된 ‘깃(fins)’ 의 방향 때문에 다른 길이로 보이는 착시가 바로 뮐러-라이어 착시다. 그림으로 제시된 선분 중 바깥쪽을 향한 깃을 가진 선분이 더 길게 보이는 것이 뮐러-라이어 착시다.

 

 

착시는 합리적인 눈의 판단일 수 있다

  

이러한 착시는 단지 뇌의 잘못된 판단일까. 물론 같은 길이의 선을 다르다고 판단했으니 뇌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같은 길이의 5센티미터라도 멀리 있을 때의 5센티미터와 가까이 있을 때의 5센티미터는 같지 않다. 우리의 눈은 멀리 있을 때의 5센티미터와 가까이 있을 때의 5센티미터를 같은 양의 길이로 볼지 몰라도 우리의 뇌는 멀리에 있는 5센티미터가 더 길다고 판단한다. 쉽게 말해 두 개의 점이 같은 크기로 보일지라도 멀리에 있을 때는 바위요, 가까이 있을 때는 파리라면, 우리의 뇌 역시 그 두 개의 점을 상이한 점으로 판단한다. 바로 이것이 뮐러-라이어 착시의 비밀이다.

 

이를 더 쉽게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극장 매표원의 왼쪽 각진 선과 출입문 왼쪽의 각진 선의 길이는 같다. 그러나 우리는 출입문 왼쪽의 각진 선을 길다고 판단한다. 왜 그럴까. 우리의 감각은 수동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은 매우 능동적이다. 컴퓨터라면 극장 매표원의 왼쪽 각진 선과 출입문 왼쪽의 각진 선의 길이는 같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리의 감각에 입력된 경험을 다시 해석하여 결론을 내린다.





도시라고 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모서리와 각이 진 환경에 곧잘 노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선분이 주어지더라도 바깥쪽을 향한 깃을 가진 선분이 더 길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초원이나 산악환경에 사는 사람들은 모서리와 각이 진 환경에 노출되는 빈도가 낮기 때문에 뮐러-라이어 착시를 잘 일으키지 않는다.

가령 완벽한 일란성 쌍둥이가 있더라도, 다시 말해 해부학적 구조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눈과 뇌를 가진 두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모서리와 각이 진 환경에 노출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선분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경험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물리적인 상이 맺히고 그 상이 시각신경을 통해 뇌로 보내지면 뇌는 과거의 경험을 불러들여 판단하고, 감각내용에 대한 최후의 의미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눈과 뇌의 물리적·생리적 작용에 더하여 환경에서 얻어진 과거의 경험을 더하여 판단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