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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책

두 번째 이야기: 교과서의 추억

 




처음 받는 교과서는 참 멋졌습니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올칼라 책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글자를 배우며 처음으로 더듬더듬 읽어가던 책은 파란색으로 인쇄된 만화책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화사한 그림책은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2년 동안 교과서는 줄곧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교과서가 잔뜩 들어간 가방을 메고 나르느라 척추가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놀랍고 다양한  기능들로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책 펼치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주로 하던 놀이입니다. 무작위로 책을 펼쳐 사람 수가 많이 나오면 이기는 경기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타짜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감으로 익혀 어느 페이지에 가장 많은 수의 사람이 나오는지 촉감으로 찾아내는 건데요. 어린 우리들 사이에서 몇 번은 통했을 기술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 속임수를 깨닫고 다른 과목 교과서로 툴을 바꾸거나 게임의 룰을 바꾸기도 했지요. 가장 사람 적게 나오는 페이지, 남자가 많이 나오는 페이지, 사진은 인정하지 않는다…등등


교과서의 여백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놀이도 유행했습니다. 책장을 촤르르르 넘기며 움직이는 그림은 지금 생각해도 멋스러운 구석이 있어요. 비행기가 날아가는 단순한 장면에서 시작하여 기승전결이 있는 대작도 제작되었습니다. 스포츠 물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SF를, 누군가는 포르노그라피를 특화하여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작하는 시간에 비해 상영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았지만 친구들 앞에 뽐내는 재미에 그 노력쯤 아깝지 않았죠.


교과서의 놀라운 기능은 스포츠에까지 이어집니다. 탁구 공 하나와 교과서 두 권이면 바로 탁구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라켓으로는 책보다 실내화가 좋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립감이 좋고 밑창에 러버(rubber)가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는데, 더러운 시도일 뿐 아니라(퉷!) 탁구공의 반발력을 적당히 살려내는 책의 절제된 쿠션감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 모드에 돌입하면 교과서는 생필품으로써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 때, 딱딱한 책상과 우리의 볼 사이를 포근하게 받쳐 주기도 하고, 컵라면을 3분만에 완숙시켜 주기도 했지요.


학력고사가 끝난 고3 교실에서, 갈탄 난로에 점화할 때면,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것도, 용도를 마친 교과서들이었습니다. ㅠ ㅠ

아낌없이 주는 건 나무만이 아니었던 거지요.


2013년에 들어서면서 전자교과서가 시범적으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년 안에 종이 교과서는 사라질지 모르겠네요. 타블렛 PC가 종이책을 대신하는 교실에서는 전혀 다른 학창시절이 펼쳐지겠지요? 우리가 낡아진 만큼 전혀 새로운 아이들이 자라날 거예요.


이래저래 생각과 걱정이 많아집니다. 다음 주에 좀 더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 추억에 감사하기만 할래요.


"고마웠다, 교과서!"

 

초식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