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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책

나의 소소하고 달콤한 거짓말

 

 

 

편집자 4년 차, 요즘 부쩍 친구들에게 듣는 말은 손이 거칠어 보여.”이다. 그러면 보통 , 종이 만지는 사람이라 그래. 종이가 수분을 많이 뺏거든.이라 답한다. 사실은 이렇다. 내 손은 타고나기를 마디뼈가 굵고 거뭇한 손이고, 집에서 이것저것 무얼 해먹는 걸 좋아하는 데다 고무장갑 끼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늘 건조하고 갈라져 있. 게다가 회사 이외의 공간에서는 로션 따위 바르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그저 종이 만지는 사람이라 그래라고 말하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답할 뿐이다. 마치 손의 거침이 내 직무 능력 상승과 비례할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믿음과 만족감이 드니 말이다. 4년 차 손이 종이 때문에 거칠어 봐야 얼마나 거칠겠는가..(흐흐)

 

 

주말에 딴 책 읽기를 대신한 딴짓하기로 본 영화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 주인공 벤야민은 어떤 여인의 강간 살인 사건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참히 살해된 아내를 위해 복수하려는 한 남자의 입장에 완전히 이입되어 버린 것이다. 그 여인의 남편은 매일 중앙역 같은 자리에 앉아 범인을 기다렸는데, 그가 범인을 어떻게 쫓고 복수할 것인가가 바로 벤야민의 첨예한 관심사이다. 검사보인 벤야민은 자신의 일상을 위기로 몰아넣을 만큼 위험한 이 사건에 파고들어 함께 범인을 추적해나가지만, 결국 그 사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25년을 외로이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그 사건에 집착하는 그는 자신이 목격한 이야기에 대해 강박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간다. 그의 소설은 그의 회고록이자 자신이 쟁취한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강한 의지이며 삶의 원동력이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오로지 이 사건에 바친 이 가여운 남자에게 무자비한 인생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폭로한다. 아무도 몰랐던 사건의 이면을 목도하게 된 벤야민은 모든 것이 무너짐을 느낀다 이 사건에 대한 판타지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기대어왔던 이 남자에게, 삶의 위기는 갱단으로부터 쫓기던 날들이 아니라 바로 진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진실을 알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이 사실은 진실에서 도망가기 위한 것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말이다.

 

 

지금 마감(준비)하고 있는 책 <이야기의 기원>(아직은 가제)은 인간이 예술을 향유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거짓 정보와 허구를 창조하고 또 향유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지금 여기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실제 벌어질 일을 대비해 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예술을 더욱 복잡다단하게 진화시켰고 인간의 행위와 적응 방식도 그만큼이나 진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보이드에게 우리가 누리는 문화 예술 전반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달콤한 거짓말이다. 이 달콤한 거짓말은  인간의 본래 지닌 생존 본능인 이야기 본능에 의해 인류 역사상 지속되어 왔다는 것. 여기서 '이야기'는 고대 주술적 세계의 그것에서부터 현대에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어떤 판타지, 나아가 예술적 행위 전반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 시크레토>의 벤야민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경험한 가상과 직접 목도한 진실의 괴리 앞에 무엇을 느꼈을까? 스스로 속이고 다시 깨어나는 일의 반복인 예술 행위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책을 만드는 일은 참 달콤(때로는 씁쓸...)하다. 우리가 믿는 진실을 전하고자 그것을 기만하는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 예술계 종사자(후후)로서 책 만드는 일의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내 바람은 거친 내 손에 더더욱 가치를 부여하게 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내 손을 보면서 내 전문성을 인정해주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별로. 그저 거칠고 검은 손이 있을 뿐, 그 거짓말에 심취해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 그래도 좋으니 이 달콤한 거짓말이 나를 일 잘하는 편집자로 진화시켜주면 참 좋겠다. 그렇다고 예술하자는 것은 아니고... 뭐, 그렇다는 거다.                                                                          -아이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