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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 진화에 도움이 된다?

드라마, 얼마나 자주 보시나요?

 

 

 

굳이 집중해서 보지 않더라도 다들 한두 편 정도는 즐겨 보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선택하는 기준은 배우의 연기력에서부터 작가나 감독이 누구인지까지 제각각이지만 그중

가장 우선인 것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스토리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매회 재미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야기에 개연성이 없이

자극적인 소재만 난무하다막장 드라마의 오명을 쓰게 되지요.

 

 


 

시청자들은 모두 아는 사실을 주인공들만 모른다거나 (점하나만 찍으면 감쪽같이 속는다?)


 

 

 

 


우연을 빌어 벌어지는 사건이 너무 자주 등장한다거나 (알고 보니 시어머니가 내 엄마?)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든가 (멀쩡한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두다니!)...

 

 

 

 

 

 

소위 우리가 말하는 막장 드라마들은 보통 재벌가가 등장하고, 출생의 비밀, 불륜으로 점철되다가

갈등이 해결하기 힘든 정점에 오르면 어느 한 사람이 갑자기 불치병으로 죽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해피 앤딩으로 드라마를 끝내곤 하지요.

 

 



 

 

 이런 걸 제우스엑스마키나라고 하죠

 (진중권 선생님 음성 지) 








막장드라마 욕은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만 모두들 욕하면서도 봅니다



왜일까요?

 

  

 

아마 그 이유는 '막장 드라마 속 악인이 어떠한 징벌을 받게 되는가,

그리고 선인이 최후의 순간에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데서 나오는 쾌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분명 좋은 스토리라 생각해서 보게 되진 않을 테니 말이에요.

 

 

 

엉터리인 줄 알면서도 빠져들게 되는 막장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 이야기의 기원을 읽어보면

그 의문이 조금은 풀릴 듯합니다.

 

 

 

 진화경제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다른 측면에서도 우리 인간은 다른 종들처럼 이성적으로,

즉 경제학자들이 가정하는 합리적 개인으로 행동하기보다 진화로 형성된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이야기의 기원 95페이지)고 합니다.

 

 

이에 근거하여 《이야기의 기원의 저자 브라이언 보이드는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고 협력하도록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감화적 특성이 인간 사회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더 합리적인 것인지 살펴보고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택의 기준은 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감정은 개인의 특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유구한 역사를 거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진화를 거쳐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원숭이나 침팬지보다 더 복잡한 존재입니다. 짐승들도 먹이를 구하거나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

무리의 법칙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협력을 하긴 하지만, 인간은 수백만이 한 도시에 모여 살 수 있을

도로 복잡한 체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개인이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받지 않아도

협력을 전제로 만들어진 다양한 규약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되지요.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협력은 단순히 제도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통의 감정도 함께 존재하고요.

 

 

 

진화 심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봅시다. 나와 다른 죄수가

반역죄의 혐의를 받고 루리타니아(영국 작가 앤서니 호프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유럽 국가)

독방에 갇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기소할 만한 증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자백하고 다른 죄수가 자백하지 않

는다면 나는 석방되고 그는 20년형을 받게 됩니다. 물론 그 반대라면 결과도 반대가 될 거고요.

만약 둘 다 자백한다면 둘 다 각각 10년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자백하지 않는다면 비상계엄령에 따라 둘 다 6개월 형을 받게 됩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자백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죄수가 가급적 감옥에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자백하는 게 합리적이다. 다른 죄수가 어떻게 하든, 자백하는 죄수는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두 죄수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둘 다 자기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 자백한다면 10년형을 받게 되지만, 실은 6개월형에 그칠 수도 있었다!

 

이 딜레마에는 해법이 없다. 두 사람 이상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으로 선택할 경우, 각자 단기적 이익을 포기했을 경우에 비해 모두가 사정이 나빠진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한다면, 상대방을 깊이 신뢰한다면,

둘 다 감옥에서 보내는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가 그 가정이 틀릴 경우에는(즉 상대방이 배신

경우에는) 어리석음의 대가로 20년형을 받게 될 거예요.

 

 

물론 여기서 요구되는 최선은 바로 협력일 겁니.

 

하지만 협력의 기반인 신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의 판단을 믿기는 쉽지 않겠죠.

과연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이와 같은 상황은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영화 <다크나이트>를 볼까요? 


조커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된 고담 시티.

도시를 탈출하고자 한 사람들이 두 척의 배에 몰려듭니다.

 

 

한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있고, 다른 한 척의 배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타고 있지요.

이 두 척의 배에는 배를 통째로 날려버릴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시간 안에 서로의 배를 폭파시키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예정된 시간은 다가오고 사람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상대편 배를 폭파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사람들은 투표를 시작하고, 결론은 과반수가 기폭장치를 누르는데 찬성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과감하게 기폭장치를 누르지 못합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망설임 없이

상대를 죽여야 하지만, 이들 모두가 그 선택을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어떠한 삶의 조건에서 함께 살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법칙은 무리를 지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종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고,

이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일종의 유전자처럼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이론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화론적 차원에서도 상리공생

인간의 적응과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것이지요.

 

 

진화에선 경쟁이 더 중요하다고 알았는데, 그보다 협력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니 사실 저는 의아했어요. 아마 그것이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영화 <7번 방의 선물>


 

 

 

6살배기 딸과 함께 하고픈 딸바보 아빠의 이야기에 천만 관객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영화의 감동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지요.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 영화의 스토리가 자극하는 어떤 감정을 보면 공통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공감, 약자를 억압하는 법과 사회 제도에 대한 분노 등,

잘 짜인 영화의 스토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감정, 공정함, 사기에 대한 경계심,

악인에 대한 분노와 징벌 등을 본능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공통의 인식이야 말로 문화, 규범, 관습, 이야기가 인류 역사상 지속할 수 있게 한

진화적 동력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브라이언 보이드의 논지이고요.

 

 

 

 

진화의 렌즈를 통해 인간 본성을 보는 편에서는 인간의 지능이 유전자를 극복하고 거부할 수 있게

해준다 주장합니다. 우리는 의식적 성찰, 문화적 규범, 사회적 제재의 두려움을 통해

자신을 억제할 수 있으니까요.

 

 

 

유전자 자체가 인간과 기타 사회적 동물들이 가진 도덕적 감정을 낳으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고자 한다는 주장 역시도 이런 논지에서 보면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서로 경쟁하지만 우리의 진된 감정은 대체로 협력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진화된 본성의 소산인 지능과 사회성을 이용해 협력의 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법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이야기의 기원, 10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진화의 과정과 해법을 찾는 과정에 

모두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데 있겠지요.



진화를 위한 적응의 일종인 협력이 합리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로 서로의 입장에 자신의 입을 기대어보는 감정이입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막장드라마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막장드라마는 바로 스토리텔링을 통해 사회적 규약,

진화의 원리를 깨는 인간에 대한 징벌이 이뤄지는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7번 방의 선물>처럼 감동을 주는 잘 짜인 스토리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고 보면 관객들 모두가 영화관이나 티비 앞에서 스토리텔링을 경험하면서

자기도 모른 사이 그 인간 진화의 산실을 공유하면서 다시한번 진화적 질서를 다시 세우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막장드라마 이야기하다 진화적 질서까지 이야기가 흘러왔네요.

 

그래서 결론은??

 

 

 

막장 드라마, 하면서 보면 인류 진화에 '도움'이 됩니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