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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책

고은의 일기와 1960년을 묻다





고은의 일기와 1960년을 묻다

 

마감하느라 책 읽을 틈이 없었다. 마감 끝내고 출간하자마자 사둔 책 2권을 애써 억지로 읽었다기보다는 읽다보니 술술 재밌게 읽었다. 하나는 고은의 일기 중 1973년부터 77년까지의 일기를 모은 <바람의 사상>, 다른 하나는 권보드래, 천정환 선생의 <1960년을 묻다>.

 

고은의 일기는 정말 간결 담백하게 읽힌다. 누구와 어디서 만나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 인물들과 만남의 내용이 꽤 재밌다. 치열한 글로 오랫동안 후학들의 글쓰기 모본이 된 ‘김현’이 고은 선생과 거의 단짝처럼 지냈고, 또 술을 정말 엄청나게 마셔댔음도 새삼 즐거운 읽을거리다. 파시즘의 시대를 술로 달랬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데카당스한 양반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술을 즐겁게 마신 양반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울러 당시 지금의 원로급 문학계 인사들의 교류가 생각보다 빈번하고 사적으로 많이 얽혀 있구나 싶었다. 중간중간 정치상황, 분단현실에 대한 짤막한 소회 들로 당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점도 재밌다. 가정부로 젊은 여자아이 ‘이화’를 들였는데, 이 가정부가 밖으로 자주 나돌아, 일요일마다 중국음식 시켜먹는 이야기가 재밌어서 혼자 킥킥 웃었다.

사실 이런 게 재밌다. 별 이론적이고, 심각한 거보다는 문단의 뒷얘기나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공식적인 언어로 포장된 인물 이면의 삶의 낯짝을 보는 일.

이를 학문적으로 좀더 밀고나간 기획이 권보드래, 천정환 선생의 책이다. 고은의 책이 사적인 담화의 모음이라면, <1960년을 묻다>는 그런 사적이고 문화적인 기록들을 학자의 시선으로 벼려내, 보편성을 잡아내려는 의도로 기획된 책이다.

 

책의 집필의도를 밝힌 서문에서 보듯이 저자들은 지금 한국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들의 원류를 1960년대에서 찾고 있다. 어쩌면 그만큼 저평가되어 있는 4·19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자는 취지다. 박근혜를 통해 표출되는 박정희 시대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4·19를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라는 입장이다.

‘4·19는 왜 기적이 되지 못했는가’라는 꼭지로 시작하는 이 책은 4·19가 지식인, 대학생의 전유물로 상징되는 세간의 인식에 의문을 품고, 당대의 사료와 문학작품 등을 훑어 혁명의 촉발은 고등학생과 이른바 ‘제4세력’으로 지칭되는 노동자들에 의한 폭력성에서 비롯되었고, 그 폭력성을 무마한 것이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당대 사료를 주의 깊게 읽어내지 않으면 모를 평가다. 아울러 4·19의 의미를 ‘자유’로, 5·16을 ‘빵’으로 평가하거나 4·19에서 민주주의를 5·16에서 민족주의를 읽어내려는 항간의 시도들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볼수 있게 한다. 그런 방향의 연장에서 문학사적으로는 묻혀 있는 방영웅의 <분례기>에 대한 상세한 비평을 싣거나 임석진, 간첩, 사상계, 아프레걸 등 박정희 시대의 문화적, 지성적 담론과 자료들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며 당대라는 콘텍스트와 연관시켜 바라보려는 시도도 얻을 게 많다.

 

<1960년을 묻다>는 사실 문학평론도 아니고, 문학사도 아니고, 현대사도 아니고, 문화사도 아닌 그 모든 기술적 시도들이 1960년의 의미를 묻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 쓰인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문화사연구의 현재 수준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문화사로 접근하고자 하는 두 저자는 이미 다수의 책을 통해 그 가능성과 의미를 타진해왔는데, 그 절정에 이른 책이 이번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사료조사와 명확한 방향 설정, 해석의 치밀함 등 읽는 사람이 다양하게 촉발될 수 있는 계기들이 잔뜩 들어가 있는 텍스트다.

 

좋아하던 선배는 언제나 세대론은 자기 세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맺는말’에서 저자들 역시 386세대가 읽어낸 4·19세대론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정치적 봉기로 자신을 증명한 세대만이 세대론적 명칭을 허락받는다’라고 일갈하는 점, 쏙 박힌다. 책을 꼼꼼히 다 읽지 못해 확언할 수는 없지만, 두고두고 읽어볼 만한 텍스트이자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출판계의 지성담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획이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문제작임은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