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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책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청춘의 독립은 녹록치 않다. 우선은 현실적인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보증금에 높은 방세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인간답게 먹고산다고 할 정도로 살림을 할 각오도 있어야 한다. 온갖 디자인 상품으로 치장되어 있는 드라마 속 원룸과 달리 다 떨어진 벽지와 장판과 궁상맞은 가재도구 몇 개가 전부인 옥탑방과 반지하방도 당분간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골치 아프고 또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바로 부모님을 꼬시는 일이다. 그냥 떼를 부린다고 되는 일도 아니며, 자신의 성장을 한순간의 쇼맨십으로 드러내 보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말 오랫동안 신뢰와 정성을 들여 설득해야 한다. 나의 삶도 삶이지만 부모님들 또한 자신의 살점을 덜어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아픔의 이유를 정당화해줄 사전 작업에 가장 좋은 것이 어쩌면 편지일 수 있겠다. 여기, 아버지에게 보내는 결별의 편지 두 통을 소개한다.

 

 

 

 

결핵 걸린 소심남 카프카,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공간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자신보다 거대한 풍채로 우뚝 서 있는 아버지 앞에 자신의 존재는 늘 나약하고 미미했다. 자신의 의지보다 아버지의 선택이 중요한 삶을 견딜 수가 없었던 카프카는 아버지의 공간에서 탈출하고만 싶었다. 자신의 것이 없다는 불안과 죄의식 앞에서 카프카는 결혼을 통해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 사람, 너무 병약하고 소심한 나머지 결혼을 결심하자마자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애가 생기면 낳고, 그 애들을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건사하고, 나아가 바른 길로 좀 이끌어주기도 하는 등의 일은 한 인간이 대체적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기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쉽게 해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사람의 수가 사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 둘째로는 그 많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대개는 그런 일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_<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130

 

 

 

카프카는 정말 결혼을 통해 독립에 성공하고 싶었다. 단지 집을 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간과 삶을 새로 꾸리고자 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다시 선다면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도 또 다른 대등한 관계가 생길 것이기에, 그 결혼에의 의지는 강했다. 그러나 그 의지는 늘 아버지의 강압 앞에 굴절되었다. 그렇게 카프카의 결혼은 세 차례나 무산되었다. 카프카는 죽기 5년 전, 아버지를 향한 이 편지를 쓰고 전대미문의 소송을 걸었다. 번번이 무산된 자신의 탈출 시도에 대한 앙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건 좀 재밌는데, 편지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근본적으로 볼 때 (중략) 너에 대한 나의 비난은 모두 타당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 가운데에는 특히 타당한 또 하나의 비난, 즉 너는 정직하지 못하고, 비굴하며, 빌붙어 살고 있다는 비난이 빠져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입증해보이지 못했다. 내가 크게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너는 이 편지 자체만 가지고 보아도 아직 나한테 빌붙어 살고 있다.” _<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160

 

 

할 말이 없긴 하다. 정말 강적이다.

 

 

 

죽어도 이해받지 못할 딸내미의 삶

 

존 쿳시의 소설 <추락>에는 독립하겠다는 딸내미를 죽어도 이해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살고 있는 52세 백인 교수 데이비드 루리가 바로 그. 그는 자신의 제자인 22세 여대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교수직을 내주고 딸이 기거하는 시골 마을로 내려간다. 딸 루시는 흑인들이 사는 지역의 작은 농장에서 동물보호소를 관리하며 평온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흑인 셋이 집에 쳐들어와 루리를 무참히 짓밟고 딸 루시마저 윤간하면서 이 모든 평온은 깨어지고 만다. 그 와중에 흑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 루시. 루리 교수는 이 끔찍한 지옥에서 딸을 꺼내오고 싶어 안달인데 환장하게도 루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이다. 아버지의 애절한 설득에 돌아온 딸의 답변은 작은 편지 한 통뿐.

 

 

 

아버지께. 아버지는 제 말을 듣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아버지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죽은 사람이에요. 아직은 무엇이 저를 삶으로 불러낼지 모르고 있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뿐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제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이해하실지 모르겠어요. (중략)그래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지금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그리고 그 패배감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아야 할 거예요. 저는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살 수는 없어요.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아버지일 수 없듯이 말이에요.” _<추락> 242

 

 

 

딸은 자신을 카드도, 무기도, 재산도, 권리도, 위엄도, 그리고 자신을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줄 총 한 자루도 없이 그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겠다 다짐한다. 오히려 바닥에서부터 개처럼 살아야하지만 그것이 다시 시작하기위한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그녀다. 루리 교수는 이러한 딸의 태도에 자신은 영원히 딸을 이해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그곳을 뜬다. 위험하고 음험한 그 땅에 딸과 곧 태어날 아이를 남겨두고.

 

 

아마 이런 편지 두 통이라면 우리 부모님들은 까무러치고 말 거다. 이미 독립 선언 자체가 충격이니 굳이 이런 사건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문학은 문학일 뿐 오해하지 말자.

 

 

아버지의 품은 늘 넓고 따뜻하지만 때로 청춘에게 그 품은 가혹하리만치 압도적이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순리에 따라 떠나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공간에서 내 몸을 일부러 도려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가 곧 나의 세계로 일치되지는 않는다는 자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환각에서 깨는 방법이 꼭 따로 사는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간적으로 분리하면 더 쉽게 다가오긴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자주 보면 친해지니까(?). , 카프카도 각혈할 만치 힘들었고 루시도 바닥부터 시작할 일이었다는데 전세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앞으로 만들어갈 책 <아파트 게임>(가제) 아버지의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에 살아갈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간다. 아직 마감이 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밥묵자 님의 원룸이야기가 눈에 들어와 이 김에 한번 슬쩍 흘려본다. ,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께 반찬 좀 얻으러 가야겠다. (흐흐) _아이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