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마감하다 말고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남해 이야기가 나왔다. 아 남해라…. 남해 하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이 떠오르고, ‘남해 금산’은 김훈의 에세이를 떠오르게 한다. ‘한 여자’에서 ‘그 여자’로 건너가는 그 여정의 고단함과 복잡함, 하나의 사건으로 ‘그’ 여자를 떠올리게 만든 김훈의 에세이는 이성복의 ‘남해 금산’에 풍부한 표정을 불어넣었다.
‘한 여자’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여자로 떠오르기 이전의, 여자의 고통스런 잠재태이다. ‘한 여자’는 아직은 익명의 여자이며 무인칭의 여자이다. ‘한 여자’는 모든 여자일 수 있지만, 아직은 아무 여자도 아니다. ‘한 여자’는 구체적인 고통 속에 처한 여자이지만 어느 여자인지 알 수 없다. ‘한 여자’는 자욱하다. 우리는 ‘한 여자’를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한 여자’를 안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여자’를 안을 수 있을 뿐이다.
- 김훈 <풍경과 상처> 중
한국일보 시절의 김훈이 문학담당 기자일 때 썼던 글을 모은 이 산문집은 아직도 책장 한구석에 ‘풍경’처럼 꽂혀 있다. 지금 보면 다소 과장된 남성적 시선으로 읽어낸 면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한 여자’를 ‘한 남자’로 바꿔 읽어도 상관없겠다. 김훈 덕에 나는 ‘한’과 ‘그’라는 한국어 관형사가 지니는 미묘한 차이의 깊은 울림을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었다. 어쨌든 김훈은 내게 문학이란 감각의 반응이며, 몸의 흔적으로 읽어내는 장르라는 각인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훈이라는 감각적인 감식가는 다른 평론가들이 읽어내지 못하는 행간을 그만의 팽팽한 언어로 다듬어 보여주는 뛰어난 ‘평론가’였다.
스무 살 무렵 김남주로부터 시작된 시 읽기는 허수경으로 끝났다. 그리고 김훈은 이십대 시 읽기의 즐거운 멘토였다. 가끔 술 마시고 좋아했던 시집들을 책장에서 꺼내어 표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밥 굶어가면서 시를 읽던 시절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따뜻함으로 세상을 덮지는 못하지만, 부끄러운 줄은 알고 살리라. 마감하다 말고 동료들과 먹은 술잔의 취기를 빌려 이성복의 <남해 금산>을 한 번 더 읆조려 본다. 회사이름이 휴머니스트니까 조금 덜 쪽팔리겠지….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따라 돌 속으로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밥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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