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 무도회 : 06.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들에 대한 감사
여행의 묘미는 의외성에 있지 않을까.
의. 외.
‘뜻’의 ‘바깥’.
곧, 뜻밖의 그 무엇.
여행을 준비하며 뜻밖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체로 의외의 인연, 의외의 깨달음, 의외의 즐거움 같은, 좋은 것들이었다.
그러면서 의외로 더 아름다운 경험을 하리라, 의외로 더 큰 평안이 나에게 찾아오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린 것은 뜻밖에도
의외의 배탈, 의외의 예약 사고, 의외의 궂은 날씨와
의외의 다툼, 의외로 미쳐버릴 것 같은 혼란처럼 더럽거나 나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뜻대로 되는 건 고사하고 하던 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었던 거다.
스페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럽에 도착한 첫날,
파리 지하철에서 근사하게 생긴 신사에게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고,
사진으로 보고 감탄했던 게스트하우스는 창문 하나 없는 답답한 방이라 실망했다.
한국에서 예약한 야간기차는 카드를 놓고 오는 바람에 발권을 할 수가 없었고
기차역은 철도 파업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름 마스터플랜이라고 짠 계획들이 도미노처럼 넘어지면서
불안과 짜증으로 여행의 초반이 함께 넘어지고 있었다.
(얘들아, 집에 갈까?)
산티아고의 여정에 올라서도 불안은 계속됐다.
배낭을 짊어지고 걷고, 걷고, 걷는데도 별 감흥이 없다는 게 나를 조급하게 했다.
7킬로쯤 걸었으면, 3센티미터짜리 마음속 응어리 정도는 팡 하고 터져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신의 소리가 들리는 길이라는데, 왜 날파리 윙윙대는 소리만 들리는 걸까?
아놔, 왜 깨달음이 안 오는 거지? 정수리를 내리치는 돈오는 언제 오는 걸까?
젠장, 깨달음도 좀 예약해둘걸.
(깨달음아, 너 언제 오는 거냐)
그러던 어느 날, 또 낭패를 만났다.
하루 종일을 걸어 도착한 마을에 숙소가 모두 동이 난 거다.
순례자 숙소는 물론이고 일반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팬션에도 남는 방이 없었다.
다음 마을은 5킬로미터를 더 걸어가야 나왔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배는 고팠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우리는 조급과 호들갑을 섞어 떨면서 콜택시를 불러 다음 마을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다음 마을에도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다섯 배나 더 되는 돈을 주고 개인 팬션에 짐을 풀었지만
안도감도 잠시, 도보 여행 중간에 택시를 타는 반칙을 저질렀다는 사실과
예상보다 큰돈을 썼다는 생각이 스멀거리며 심사가 편치 않았다.
(왜 택시를 탔을까...)
저녁을 먹으러 나선 길에
우리는 그날 낮에 걷는 동안 계속 마주쳤던 독일 청년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마을 광장을 돌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5킬로를 더 걸어왔느냐 물었더니, 당연한 거 아니야? 하는 대답.
그래서 방은 구했니 물었더니, 방이 없다는 거 너도 알잖니? 하는 미소를 섞은 대답.
그럼 비 오는 이 밤에 노숙을 할거냐 물었더니,
동네 슈퍼마켓이 문을 닫으면 그곳에서 매트를 깔고 하룻밤 신세지기로 했다는 대답.
우리 방이 비싸고 넓으니 거기서 함께 묵자고 허세를 부렸더니,
슈퍼마켓 주인과 약속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고,
슈퍼마켓 바닥이 자신들에게 오히려 편안할 것 같다는 편안한 대답이 돌아왔다.
(슈퍼마켓 바닥 어때? 콜?)
우리는 그날 밤 철제로 온갖 무늬를 수놓은 공주 침대 위에서
꽃가라 이불을 덮고 밤을 보냈지만 편치 않았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잠을 잘 이루지 못했으며,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에 시달렸다.
그리고 다음 날, 비 갠 문밖으로 길을 나서면서
하루의 계획에 대해 더 이상 의논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애초에 ‘꼭 그래야 하는 건’ 없었다.
걸어도 좋고,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이었고
누구를 만날지, 어디에서 길을 잃을지 몰라서 오히려 좋은 시간들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한국에서 인터넷과 책으로 얻은 수많은 팁과 정보들,
촘촘하게 챙겨 두었던 코스와 준비물은 그저 내 만족을 위한 것일 뿐
정답이 아니었으며 실제의 여행과도 별반 상관이 없었다.
몸에 힘을 풀고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여행자들은 그 뒤로도 많이 보였다.
기능성 아웃도어 옷을 풀세트로 차려입지 않아도 40킬로를 너끈히 걷는 사람이 있었고,
돈이 한 푼도 없는 채로 봇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도 만났으며
얼마나 많이, 빨리 걸었느냐는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며
한 마을에서 며칠을 머무르는 사람도 있었다.
애완 당나귀의 땀을 닦아 주며 함께 길을 걷고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천천히 걷거나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우며 걷는 순례자도 있었다.
그 지역의 유명한 무언가를 못 보고 지나쳤다거나
꼭 들러야 할 맛집을 놓치고 지나쳐 버렸다 해도 별반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
(순례 당나귀)
그 후로도 우리에겐 계속 의외의 곤란들이 벌어졌고, 몹쓸 괴로움들도 함께 펼쳐졌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만!’ 하는 짜증은 별로 나지 않았다.
뜻밖의 세상이 오히려 진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안심.
뜻을 촘촘히 세울수록 뜻대로 되는 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는 힘이 뜻밖에도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
‘뜻’ ‘밖’을 넘나들며 한 뼘씩 찢어지는 내 세계의 그릇이 나를 점점 어른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믿음.
그래서 결국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내 뜻을 더 키우고 다듬어 주리라는 깨달음.
(산티아고의 땅 끝)
떠나 보니 알게 된 두 번째 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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