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번 연재는 휴머니스트의 멋진 직원복지 금요격주휴무제로 휴가차 다녀온 제주도 2박3일 여행기를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믿고 싶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참극이 일어났죠. 전 국민 모두가 침묵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 만인의 정인도 답답한 심정을 휴로그에 남겨보기로 합니다.
장면 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권 [인종·명종실록] 181쪽 '을묘왜변'
수령과 조정은 재물만을 탐하고 백성들은 살기가 점점 더 고단해졌던 조선 명종 시대. 국방도 온전하지 못 했던 명종 10년 5월에 왜선 70여 척이 전라도 해안으로 쳐들어옵니다. 바로, 을묘왜변입니다.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대적할 수 있었음에도 싸울 생각도 하지 않은 장수들은 도망가고 도성들은 줄줄이 함락 당합니다.
장면 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권 [선조실록] 제3장 일본의 침략 무너지는 조선 '파죽지세의 침략군' 121쪽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권 [선조실록] 제3장 일본의 침략 무너지는 조선 '불타는 궁궐' 132쪽
선조 25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결정하고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킵니다.
이 정보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정은 경계를 게을리하고 장수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조선은 침략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나서야 침략 사실을 알고, 해전 한 번 해보지 못한 체 침략군이 조선 땅을 밟게 합니다. 성들은 함락 당하고 수천의 군민들이 왜군에게 도륙 당하지만, 누구보다 선봉에서 전쟁을 진두지휘해야 할 장수들은 군대와 백성, 성과 무기를 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버립니다.
그리고! 북상하는 일본 침략군의 소식을 들은 왕은 나라를 버리고 새벽같이 피난길에 나섭니다. 왕이? 왕이!
장면 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권 [선조실록] 제3장 일본의 침략 무너지는 조선 '불타는 궁궐' 134쪽
백성을 버리고 떠난 임금... 도망치는 장수들...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산 것도 모자라 왜군에게 목숨까지 내줘버리다니요. 나라만 믿고 살았던 그들을 아무도 지켜주지 않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장면 4.
휴먼어린이 그림책 <갈색아침>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갈색 법'. 갈색 고양이를 제외하고 그 밖의 고양이는 다 죽여야 한다는 법이 생기고, 갈색 개만 남기고 나머지 개는 다 죽여야 한다는 법도 생깁니다. 이렇게 시작된 독재 정부의 횡포는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입니다. 법이 생기기 전에 갈색이 아닌 동물을 키웠던 사람들은 처벌을 당하고, 정부를 지지하는 '갈색 신문'만 남기고 모든 신문들은 폐간됩니다. 정부에 반대하던 출판사들은 소송에 휘말려서 재판을 받게 되고 해당 출판사들의 책은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벌을 받을까 봐 신문도 '갈색 신문', 커피를 주문할 때도 '갈색 커피', 경마장에서 돈을 걸 때도 갈색 말, '갈색'에 지배당합니다.
휴머니스트 책에서 본 장면들, 지금 우리 사회의 일면과 너무나도 닮은 것 같지 않나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세월호 침몰 사고.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인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와 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무자비한 선원들,
사고 수습 대책은 별로 없지만 변명은 많은 관계 기관,
자책하고 있어야 하지만 떠들어대기 바쁜 의원들,
자극적인 것은 좋으나 비극을 전하는 방법은 잘 모르는 것 같은 매체,
정부에 누가 될 말들은 다 막아버리는 국가 기관,
누구보다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국민의 아픔에 공감해야 하지만, 책임자가 아닌 심판자가 되어버린 대통령.
세태를 비난하고 입으로는 욕을 뱉어내지만,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편하고 단순한 방관자 삶에 길들어가고 있는 나.
권위만 있고 합리성과 효율성은 무시하는 관료제, 책임 회피를 위해 윗선의 지시만을 기다리는 조직 체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원칙과 공정함, 자기 보신만을 위한 극한의 이기주의... 리더십과 인간성이 부재한 체제가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월호는 차가운 바닷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치 분야를 비롯하여 경제·교육·종교 등 각종 사회 분야, 심지어 가정에서의 리더십도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산업 형태의 변화와 함께 탈근대 지식산업사회가 도래하고 가족 구성이 질적으로 변하는 등 사회구조가 크게 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종래의 지연·학연·이데올로기 등의 사회적 대립 요인 이외에, 우승열패의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구직난과 급속한 노령화 및 향유 문화의 이질성 등에서 오는 세대간의 반목 등으로 사회 전반에 갈등과 대립이 극심해지고 나아가 양극화 현상이 고착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여러 방면의 상당수 리더들은 이 같은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하기도 하며, 심지어 정치·사회·학술·종교 등 각 분야에서는 사회적 갈등의 와중에 한쪽 편의 지지를 확고히 얻는 것이 갖는 이점의 단맛을 알아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며 갈등의 열매를 따먹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면이 있었다.
(중략)
실로 우리 사회가 더욱 안정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동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는 당연히 시민사회에 걸맞는 민주적 양식을 갖추어야 하며, 크게 확대된 지식에 대한 상당 수준의 이해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사회변동을 이해하고 갈등과 대립을 지양할 수 있는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을 기반으로 문제해결의 방책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이여야 한다. (중략) 곧 통찰력과 창의력 및 식견, 용기와 추진력, 나아가 고결한 성품과 공정성, 성실성, 여기에 신뢰감과 포용력 등을 두루 갖추어야 할 것이다.
- '우리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을 그려보며' 中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 - 역사학자의 눈으로 본 제왕들의 국가 경영>
김기흥, 박종기, 신병주 지음
어쩌면 리더십은 그들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번 휴재 주제는 '반성'이기도 합니다.)
이면.
왜 예전에 그런 광고가 있었죠. 하루 세 번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며칠 동안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면서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세 번이 뭐예요. 하루에도 수도 없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소식이 궁금해 이곳저곳 둘러보다 보면 울컥하는 바람에 인터넷을 하고, TV를 켜고, 신문을 보는 것도 머뭇거려져요. 그런데 비난이 쉬운 만큼 이 비극도 잊히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장과 선원들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붓는다고 끝날 문제일까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로 희생자는 더 늘어났습니다. 혼란에 가려질 이면을 응시하고 기억하는 것,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의 아픔과 이 참담한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어이없게 죽음을 맡게 된 고인과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그들의 가족을 위해,
실종자와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 사회의 앞날을 위해.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미안합니다. 이제는 도망 치려고만 하지 않겠습니다.
PS. 그리고... 제발, 그만 도망치라고요.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 '세종 이도 : 함께하는 소통정치의 표본'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벌 받습니다.
박시백이 그리는 삶과 세상 <사노라면 - 그 시절, IMF의 추억> 31쪽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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