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총선연대, 그리고 1990년대 시민운동의 분화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정점인 총선연대의 과제인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논의는 1999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의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너무 큰데, 아무리 시민운동이 압력을 가해도 변화할 조짐은 없었다. 결국, 시민단체들은 표로 심판하는 선거 과정에 참여하여 압력을 가하지 않는 한 정치권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공통의 인식을 확인하고 낙천낙선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의 선거법은 단체의 선거운동 참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합법적으로 선거운동 과정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참여를 가로막는 선거법 제87조의 개정도 함께 요구하기로 하였다. 1990년대에 선거 과정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시민운동의 모습은 금권, 관권 선거를 막고 정책 선거를 하자는 공명선거실천협의회(이하 공선협)의 활동이 주된 것이었다. 공선협 역시 선거법 제87조가 공명선거캠페인조차 제한한다며 그 개정을 강력히 요구해왔지만, 정치권은 자신들만의 독점적 선거 캠페인을 유지하려 이 조항의 개정을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시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공선협 방식의 정책 캠페인이나 공명선거캠페인이 운동 초기와 다르게 정치권 개혁에 실질적인 압력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공감대가 있었다. 결국, 주요 단체들은 합법적으로 운동하기 위해 우선은 선거법 제87조의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만일 정치권이 이를 거부하게 된다면 선거법 위반도 각오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같은 생각은 총선연대 발족 선언문에 “총선시민연대가 변화한 시대와 성숙한 유권자의 편에 서고자 한 것이 불법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법정에 설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대한 법의 권위를 존중할 것이며 총선이 시작되는 날까지 낡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시민운동의 합법성 테제〉, 하승창에서 다시 인용)
그렇게 시작하기로 한 총선연대를 구성하고 있던 2000년 1월 초, 당시 참여연대에서 일하던 양세진 씨가 급히 전화를 해왔다. 총선연대를 발족하려 하는 데, 참여의사를 전하는 단체들이 적다는 것이었다. 기획 단계에서 필자가 일하던 함께하는시민행동도 제안 단체로 참여하기로 해서 만들어진 제안문이 여러 단체에 전달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급한 대로 서울 외의 지역에 있는 단체에게는 전화를 돌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대개 마음은 가지만 단체 임원들을 미처 설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역시 선거법 제87조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또 하나 총선연대가 출범한다고 할 때 경실련의 참여 여부는 적지 않은 이슈였다. 왜냐하면 정치권과 선관위가 낙천낙선운동은 불법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었고, 당시에 경실련은 불법적인 방식의 운동은 할 수 없으며, 총선연대의 활동이 불법을 각오하고 있다고 하면 참여할 수 없다고 한 상황이어서 많은 단체가 참여를 섣불리 결정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인가 경실련이 167명의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다. 총선연대가 이미 낙천낙선운동을 선언하고 참여단체들을 모으는 중이었고, 경실련에도 제안했지만 경실련은 선거법을 위반하게 될 개연성이 있어서 합법적 운동을 한다는 경실련의 취지에 맞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참여를 결정하기 어렵다는 전달을 받은 상태라 다들 당황하게 되었다. 다음날 각 신문과 방송에는 경실련의 공천부적격자 명단이 도배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보도되었고 시민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경실련의 웹사이트는 네티즌들이 몰려 바로 다운되었고, 명단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전화가 몰려 경실련 멤버들과 통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낙천낙선대상자 명단 발표에 참여할 것 같지 않던 경실련이 전격적으로 명단을 발표한 것은 전해부터 준비해온 ‘정보공개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경실련의 명단이라 해도 당연히 낙천낙선자 대상자 명단 발표로 받아들여졌다. 즉각 선관위는 경실련의 명단 발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경실련이 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선관위가 불법이라고 발표하면서 결과적으로 낙천낙선운동이 대세라는 인식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물론 이후 총선연대의 명단 발표까지 이어지고 경실련도 총선연대 지지방문을 통해 공감을 표하자, 정치권과 선관위는 명단 발표까지는 합법적이라고 했다. 이로써 선거법 제87조의 관련 조항은 논란이 이어진 지 한 달도 채 안 된 2월 초에 수정하게 된다.).
그래서 경실련의 명단 발표 이후 결정을 미루고 있던 단체들이 낙천낙선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대거 총선연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출범 기자회견 전에 412개의 단체가 참여를 결정했고, 이후 석 달간 이어진 총선연대 활동에 참여한 단체는 1000개가 넘어 시민단체 연대활동 사상 최대의 단체가 참여했다.
그러나 발족 당시의 이 미묘한 논란은 향후 총선연대 활동 내내 그리고 활동이 끝나고 난 후 제대로 된 논쟁이 한 번도 없었던 시민운동 내 노선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시작은 경실련의 창립자인 서경석 목사로부터였다. 서경석 목사는 2000년 11월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주최한 제3회 시민단체대회에서 경실련으로 대표되는 그동안의 시민운동과 달리 16대 총선 시에 나타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국민의 호응도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다중추수적, 포퓰리즘적 운동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총선연대의 문제를 첫째, 국민의 호응이 열렬하다고 해서 시민운동이 판관이 되어 낙선자명단을 절대무오류의 명단으로 확정하고 언론의 여론몰이의 도움을 입어 다중의 힘으로 이를 밀어붙이는 방식의 운동은 시민운동의 바른길이 아니며, 둘째 낙천낙선운동이 탈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서 이 때문에 공선협이 십 년 가까이 공들여왔던 준법의 틀이 무너져, 시민운동이 이 불법성에 대해 답하지 못하면 앞으로 국민을 향해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서경석, 〈한국 시민운동의 재정립을 위하여〉, 2000년 3회 한국시민단체대회 27-28쪽, 한국시민단체협의회, 2000).
서경석 목사의 문제 제기에 총선연대가 즉각 대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이어 경실련 측 인사들의 미디어를 통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TV 토론 주제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결국, 당시 주간지인 시민의 신문을 통해 경실련 사무총장 출신인 이석연 변호사와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던 박원순 변호사 간의 논쟁이 이어졌다. 이 논쟁은 서울대 법지배연구소의 워크숍에서 필자가 발표한 〈시민운동의 합법성 테제〉라는 제목의 글에 약간 소개되었다.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이석연 변호사는 “시민단체는 개혁을 위해서라면 법치주의도 뛰어넘어도 된다는 권한을 헌법으로부터 부여받지 않았다. 개혁을 명분으로 많은 논란이 있고 법철학적으로 불확정 개념인 악법에 대한 저항권 이론을 내세워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을 때에는 시민운동은 그 한계를 벗어나서 그 행위에 대한 헌법적 정당성이나 국민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된다.”라고 주장하며 법치주의를 벗어나는 시민운동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표현하였다. 박원순 변호사는 “현존 법질서를 지키기 위해 시민운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시민운동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신념을 한 시대에서는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법제가 그동안 바뀌어 왔다. 바로 5년, 10년 전에 제삼자 개입 금지로 노동운동가들을 욱죄어 왔다. 지금은 다 합법화되었다. 심지어 50년, 1백 년 전에 여성의 투표권은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많은 시민운동가와 여성운동가가 그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해 감옥에 갔다. 지금 그 사람들이 (법을 넘어섰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운동가는 그런 신념과 다음 시대를 위해 싸울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 다른 시각을 확연히 드러냈다.
이처럼 총선연대 이후 진행된 약간의 논쟁은 시민운동의 합법성에 대한 시민운동 활동가들의 인식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설사 그것이 틀린 법이라고 생각되어도 지키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서경석 목사의 확신은 실제 경실련이 모든 집회와 시위를 집시법의 조항을 철저히 지키면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 법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도로를 조사할 정도였다. 경실련이 조사하여 만들어 낸 집회 장소와 시위 코스는 언제나 다른 시민단체들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법을 지키며 법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반면에 시민운동가는 때로는 신념과 다음 시대를 위해 현존 법과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총선연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거법은 이런 싸움의 결과로 여전히 시민단체들의 선거 활동에 대해 제약하고 있지만, 과거보다 완화된 모습으로 개정되기도 하였다. 많은 환경운동가나 인권운동가는 환경 문제나 인권 문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실정법 위반인 줄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법 위반의 대가로 벌금이나 구류, 징역형 등을 ‘수용’함으로서 헌법적 가치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경석 목사는 문제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총선연대와 다른 시민운동 진영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총선연대 이후 만들어진 시민단체연대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서경석 목사는 이후 점차 뉴라이트 운동의 발족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시민운동의 다른 진영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보수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는 시민운동을 만들고 확산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1990년대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보수단체들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 대열 내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이후 노무현 정부 들어서 본격화된 보수적인 시민단체들의 등장이 앞선 그래프에서 2004년에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노출 빈도가 다시 높아지게 되는 변곡점을 기록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하나의 근거라 하는 것은 이 무렵 시민운동은 1990년대의 시민단체들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는 그룹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그룹의 노출 빈도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앞서의 그래프에서 본 것처럼 그러면 1990년대에 성장했던 시민단체들은 어떻게 성장했고, 이후에는 왜 과거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인지 차례로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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