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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경실련으로 시작된 1990년대 시민단체, 참여연대로 자리 잡다

 

 

 

 

 

1990년대에 급격히 성장한 시민단체들은 총선연대 활동을 거치며 사회적 영향력의 정점을 찍었지만, 언론과 정치권의 견제로 성장이 위축되는 모습도 보였다. 동시에 보수적인 시민단체들의 등장과 보수적인 정부의 등장으로 과거 같은 영향력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의 시민단체 활동이 199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이 반드시 그런 외적인 조건 탓만은 아니다. 1990년대에 성장한 시민단체들이 언론의 우호적 보도 태도 같은 외적인 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1980년대와 다른 사회적 변화와 새로운 사회적 문제의 발생에 대한 나름의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2000년대의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점은 내적 문제로 인식하고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2000년대 주요 시민단체들이 주춤하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기 전에 1990년대에 시민단체들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 배경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성장의 이유를 살펴보면 반대로 위축의 이유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민단체든 무엇이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올 때 인지하지 못하면 뒤처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를 포착해 냈던 1990년대 시민단체들이 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는 여러 대학에 엔지오 관련 학과도 생기고 관련한 논문으로 학위를 하는 사람도 나오면서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1990년대 시민단체들의 성장 배경에는 1987년 민주화운동이 자리한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은 시민운동의 태동과 성장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한국사회와 그 이후의 한국 사회를 다르게 만든 일종의 결절점 같은 사건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잇는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경제와 사회의 발전 전략이 달라졌고, 정치 과정이 달라졌고, 문화가 달라졌으며, 시민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그러나 역사에서 그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 그 같은 총체적인 변화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공유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변화를 감지한 앞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의 시도가 새 길을 내는 법이다.

 

 

당시 노동 운동에 몸 담았던 나는 실상 그 큰 변화를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민주화운동에 연이어 그 해 7월과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사회 현상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공장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 세력화를 위한 정치 토론이 벌어지는 각종 노동자 대회나 워크숍 현장으로, 하루하루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소련에서 진행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 같은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세월이 조금 지나서야 나름의 인식의 틀로 정리했다. 1988년과 1989년을 지나며 전노협이나 전교협 같은 대중적인 단체들이 만들어지면서 비밀 조직으로 있던 단체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노동조합운동은 성장하는데, 그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던 비밀 조직은 오히려 영향력이 줄어드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 큰 변화가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비밀 조직의 형태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은 그 비밀 조직에 모인 사람들의 활동으로만 범위를 좁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1990년 초에 스스로 활동을 접기에 이른다. 1980년대 내내 나를 지탱했던 이념적 기초나 활동의 방법론에 대한 회의는 더는 나를 노동운동에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새 길을 내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운동이라는 당시로써는 낯선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냈던 사람들은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지금은 약칭 경실련으로 잘 알려진 시민단체를 만든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권력을 구성하는 합법적 방식으로 선거라는 공간을 갖게 된 우리 사회는 그동안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민중운동의 운동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시민운동은 그런 변화 위에서 시작되었다. 경실련은 스스로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정책 대안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민중운동과 선을 그었고, 변화된 사회 환경에 조응하는 운동으로 주목받았다.

 

서경석 목사는 1987년 이후 변화된 사회적 조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폭력적 방식의 투쟁으로 강령적 주장들을 구호로 외치고 있던 민중운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그룹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활동했던 새문안 교회 출신의 기독교운동 그룹과 YMCA 출신 인사들, 변형윤 교수의 제자 그룹들인 경제학자들을 연결하고, 당시에도 우리 사회의 큰 문제였던 부동산 문제를 첫 번째 과제로 들고 나왔다. 구체적 과제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해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 모임으로 단체의 정체성을 정하자는 주장도 강력했지만, 경제 정의 전반을 다루려면 그에 맞는 이름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밀려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경실련은 출범하자마자 기존 민중운동 세력들의 회의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한다. 민중운동 진영에 있던 공해추방연합이 환경 문제에 관심 있던 다른 그룹들과 함께 환경운동연합을 만들고, 여성 평우회가 여성민우회로 변화하고, 녹색연합이 발족하는 등 1990년대 초반 무렵이면 지금의 주요한 시민단체들이 모두 창립된다. 1994년에는 참여연대가 창립되면서 1990년대의 시민운동’, ‘시민단체는 주요한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참여연대는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사 그룹과 조희연 교수를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의 사회과학자들과 김기식, 김민영 등의 학생운동 출신으로 막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던 그룹들이 함께 모여 창립된다. 단체를 창립할 때 언제나 가장 중요하게 논의하는 것이 단체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어떤 과제로 할 것이냐이다. 아무래도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시민단체를 만들게 되면 경실련과 비슷한 단체를 또 만드는 것이 맞느냐는 시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참여연대는 경실련이 내세운 경제 정의 대신에 사법 개혁이나 복지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내세웠고, 단체 이름이 의미하듯 시민 참여라는 방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정책 대안을 중심으로 운동한다는 점이나 시민입법운동을 강조하면서 합법적 방식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 운동의 방식과 관련해서는 경실련과 차이가 있기 어려웠다. 과제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과 함께 경실련과의 구별과 관련해 경실련은 우실련, 참여연대는 좌실련이라는 이야기도 오갔을 정도로 가치 지향이 차이를 강조하려는 흐름도 있었다. 어쩌면 이 차이가 몇 년 후 총선연대 활동을 지나면서 다른 방향으로 활동해 나가는 차이로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