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계를 향한 요구는 크나, 준비는 부족하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제목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하나는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세계화에 관한 국제포럼 IFG, 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 필맥, 2009)≫, 다른 하나는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요르겐 렌더스, 생각연구소, 2013)≫라는 책이다. 마치 반쯤 찬 물 한 컵을 놓고 반이나 남았다고 하는 것과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 같은 제목이지만 두 책 모두 지금 같은 사회 발전 패러다임으로는 이 세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우리가 사는 삶의 패러다임과 사회 발전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지난 대선이 우리 사회에서는 바로 이런 인식, 지금까지 우리 사회 발전의 패러다임이 더는 유용하지 않으며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된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 석 달여 기간 동안 나는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안철수 현상’이란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었고, 안철수 후보는 개인 안철수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욕구를 연결해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의 중도 사퇴로 그런 욕구는 실현되지 못했다. 과정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뒤로하고, 안철수 후보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말대로 준비 부족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로 보면 여전히 사회적 준비가 부족했다고 보아야만 다음을 준비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안철수 개인의 준비가 부족한 것이라면 이제 그만 준비를 잘하면 되는 단순한 해법이 도출되는데, 세상에 그런 변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도 개인에 의존한 정치적 기획이 여전한 것으로 보이고, 이는 지난 실패의 반복이 되기 쉽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기간에 두 달여 전국을 다니면서 나는 오히려 변화의 욕구는 큰데, 그 변화를 담을 세력의 크기는 작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지난 몇 달 동안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느낀다. 변화의 욕구가 큰 만큼 그 변화를 자신의 자리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꿈틀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새로운 변화를 향한 생각과 열망들을 연결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닐까.
불안하고 불행한 사회는 누구나 싫다
사람들은 왜 변화를 바랄까? 지금의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지표로 누구나 인용하는 것이 자살률과 출산율이다. OECD 국가 중 1위라는 자살률은 거의 사회적 재난 수준이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든 세대에 공통적이고, 빈부의 격차를 넘어 서는 것이다. 또한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아이를 기르기 어려워 아예 낳는 것을 조절하거나 두려워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스스로 조절하는 것뿐 아니라 강제하는 경우도 있다. 임신 순번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지난해 6월 조합원 2만 명을 대상으로 모성보호 실태 조사를 한 결과 국립중앙의료원, 보훈병원, 산재병원 등 특수 목적 공공병원 간호사 중 임신 순번제를 겪었다는 응답률은 26.5%에 달했다. 특수 목적 공공병원은 유·사산율이 27.6%로 심각한 상태였고, 82.5%는 육아휴직도 못 썼다고 했다. 어떤 민간병원은 2004~2006년 신입 간호사에게 “2년이 지나야 결혼할 수 있고, 혼전 임신 시 사직을 원칙으로 한다.”라는 각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기계도 아니고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것조차 무슨 작전 짜듯이 해야 하는 세상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누구도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지난해 싱크카페 콘퍼런스의 주제를 ‘불안, 불행, 불통, 불만’으로 잡았다. 콘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나온 키워드들이다. 준비하는 사람들 모두 지금의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불행한 사회라고 느끼고 있다고 보았고, 그런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않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며 불만이 가득 찬 사회라고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세대를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정서이기도 하다.
노인은 노인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불안한 사회다. 함께 사는 아버님께서 은퇴하신 후 마땅한 일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경로당에 나가 고스톱 치는 일이 많아지시는 것을 보면서 혹여 그것이 우리 세대의 미래는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요즘 만나는 청년들은 지금 일하는 아르바이트마저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지 늘 불안해하며 살아간다. 더구나 위험은 우리의 일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평온한 우리 일상과 관계없이 언제든 위험이 세계 공동체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툭하면 고장 소식이 들려오는 한반도 남단의 원전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불안과 항상 동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것뿐인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24시간을 쪼개어 공부에 매달리고, 1등을 해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갖고 사는 아이들은 그 불안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기마다 등록금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아이들을 온갖 알바전선으로 내몬다. 청년일자리허브의 청년학교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해본 사람?” 했더니 정말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함께 있던 10여 명의 아이가 전부 손을 들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싱크카페 콘퍼런스에서 김영경 전 청년유니온 위원장의 이야기는 이런 청년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영경 위원장의 말을 옮겨본다.
“얼마 전 청년유니온에서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청년 최저임금 사례자 증언대회’를 열고 저임금 청년 8인의 가계부 내역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통계를 내보니 이들은 월평균 120만 원가량 벌고, 임금의 60%를 주거비, 식비, 교통비 등 기본적인 생활비에 충당하며, 나머지 40%에서 23%가량은 학자금 같은 빚 갚는 데에 지출하고 있더군요. 그런 청년들이 어떻게 문화생활을 하며, 교육에 투자하고, 저축을 할 수 있을까요? 노후 설계는 꿈도 못 꿀 일이죠.”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까?≫, 상상너머, 2012, 하승창 외
청년들의 이런 현실은 졸업반이 다가올수록 심각해진다. 취업 걱정에 도서관에 삶을 매달아 두지만 취업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늘 불안하다. 불안감을 없애려고 온갖 스펙을 다 만들어보지만, 1등만이 살아남는 경쟁 시스템 아래서 슈퍼맨이 내 앞에 나타나는 현실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 대부분 좌절을 겪게 마련이다. 설사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많은 이가 비정규직이 되고 그러므로 취업을 해서도 언제 계약해지가 될지 모르는 ‘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지난 대선에서 손학규 대표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청춘들에게 로망이기도 하다. 불안 대신에 그런 여유와 자존감을 느끼는 삶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물론 정규직이라고 해서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짧아진 정년과 언제든 해고당해 실업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부모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깨가 처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두 번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공동체를 찾는 것은 어쩌면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다, 연결되지 않았을 뿐
지난해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삶의 패러다임을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보자고 했던 것일 터, 그러나 어쨌든 그 같은 사람들의 욕구는 박근혜 정부의 몫이 되었다. 대개 사회운동의 영역에 있던 다른 패러다임의 삶을 원했던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쨌든 박근혜 정부도 기대만큼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나 변화의 방향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변화를 원하는 욕구의 실현은 어려워졌다. 그러면 이제 희망은 없는 것인가? 다른 패러다임의 삶을 원하는 욕구의 크기에 비해 그를 실현할 세력의 부재라는 현실에 대한 자각은 지난겨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 같은 세대와는 다른 청년 세대나 기존의 사회운동과 연결되지 않은 다른 사회적 세력의 성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사회적 경제 영역의 기업이나 조합, 청년학교 같은 곳, 싱크카페를 매개로 한 청년들의 활동 등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성장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대부분 기존의 사회운동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단절이 생겼을까? 어쩌면 2000년대의 시민운동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그 까닭과 이유를 알게 된다면 희망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런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알지 못하면, 명백히 다른 사회적 패러다임을 원하는 세력의 크기가 커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권력의 변화로 연결해 내지 못할 테니까.
그를 위해 2000년대 시민운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먼저 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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