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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人

이 느낌적인 느낌의 세계, 그래 느낌 아니까~

 

 

 

유행어에 편승하는 글… 맞다. 요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느낌 아니까’라는 말에 매번 피식 웃음이 난다. 사실 느낌은 각자만이 알 수 있는 세계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느낌을 전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내 경험치로 그의 느낌을 짐작할 뿐이지만 기분 좋은 말이긴 하다. 느낌을 안다는 건 어떤 순간을, 어떤 대상을, 어떤 일을 오롯이 경험했다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그의 온 감각을 활짝 열어 본 적이 있다는 고백이니까.

 

마감을 할 때는 뭘 느낄 여유가 없다. 글자는 꼬리를 문 개미고 문장은 층층 시루떡 같다. 예민해지지만 실은 몹시 둔감하기도 하다. 몸의 감각을 열어 놓기 보다는 글자들의 세상 속으로 웅크린다. 그래서일까. 아, 이 끝없는 문장의 향연, 이제 그만 멈추고 내 손을 떠나 달라 중얼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싫증난 애인을 바라보듯 글은 초라해지고 책은 색이 바래져 있다.

 

김소연 시인의 글을 처음 만난 것도 그럴 때였다. 《파브르 곤충기》 완역판 편집이 막바지였다. 열 권 째 마감을 할 때는 이미 내 몸이 갑각류의 반열에 올랐다. 글의 맛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나 또한 곤충 같은 미물로 먹고 자고 싸고를 반복하지 않나 냉소했다. 그때 읽은 그의 《마음사전》은 둔탁해진 글과 삶에 대한 감각들을 서서히 일깨우고 돌려놓은 책이다.

 

 

외롭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 동사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그 말에는 외로움을 어쩌지 못해 이미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 놓는다.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들을,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이 자존심이 되고 누군가가 불어넣어주는 것이 자존감이 된다. 자존심은 누군가 할퀴려 들며 발톱을 드러낼 때에 가장 맹렬히 맞서고, 자존감은 사나운 발톱을 뒤로 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길고 긴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_ 김소연, 《마음사전》

 

 

시인은 일상적인 단어들을 자기만의 섬세한 느낌과 직관으로 들여다보고 또 곱씹어 전했는데, 나는 매일 밤 한 단어씩을 읽어 내려가며 시인이 맛본 삶의 느낌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세상을 ‘아는 법’이 아니라 ‘느끼는 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 후로도 종종 마감에 시달릴 때나 생활의 껍데기가 두터워질 때마다 이 책을 꺼내 감각의 때를 벗기곤 했다.

 

그리고 최근, 다시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을 만났다. 하루 계획, 한 주 계획, 한 달 계획과 한 해의 계획, 오지 않을지도 모를 노년의 계획까지. 러시아 인형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계획의 그물에 나를 구겨 넣는 생활, 초등학생의 일기처럼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다 해낸 것만으로 자족하며 지내는 생활, 의지만 살아 있고 직관과 감각은 무뎌져 전혀 느낌이 없는 생활을, 오랜만에 내 앞에 등장한 시인은 다시 빠직! 찢어주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함은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도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도 투쟁하는 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 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여기엔 싸우고 이겨서 쟁취해낼 거란 의지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개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_ 김소연, 《시옷의 세계》

 

 

시인은 여전히 몸의 감각을 깨워 두고 주변을 들여다보고 갸우뚱 짚어 보고 오래 멈춰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사색을 담아 《시옷의 세계》라는 책을 내놓았다. 글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호흡이 가라앉고 속도가 느려짐을 느꼈다. 머리는 멈추고 몸은 살아났다. 시인의 시선으로 내 주변을 스캔해 보니 일상이 먼지를 탁탁 털고 제 색깔을 냈다. 별반 다를 것 없는 매일이지만 ‘느낌 아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컸다.

 

시인은 천성을 따르고 지키며 살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린다.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닥치는 것들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 느끼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직관, 스스로의 안목, 스스로의 느낌을 따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자연스럽게 오늘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찬찬히 흐르는 글들 속에 담아 두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대체로 이성과 계획보다는 직관과 느낌에 따라 결정돼 온 게 아닐까 싶다. 완벽하진 않지만 달리 아쉽지도 않았던 선택들. ‘느낌 알기’란 쉽지가 않지만 일단 느낌이 왔다면 그건 그대로 가보아도 좋을 일이다. 느낌을 믿는 건 어쩌면 자신을 믿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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