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치고, 최근에 읽은 책은 우치다 타츠루의 《일본변경론》과 《스승은 있다》이다. 최근에 다시 시작한 검도의 재미에 빠져 무도를 하고 있는 지식인이 어디 없나 해서 알아보다, 우치다 타츠루가 합기도 8단의 고수이며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도쿄에 문무를 함께 가르치는 ‘바람의 함성관’이라는 무술도장을 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야 비로소 접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의 딱딱한 성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손에 끌려간 쿵푸도장부터 시작해 합기도까지 10년 남짓 무술과 함께한 데 그 연유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이야 앞뒤로 나온 배와 엉덩이에 신체나이가 40대 중반에 육박하는 후덕진 몸매를 지녀, 누구도 나를 보고 운동을 잘할 것 같다거나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지만 10년 남짓 운동한 탓에 몇 번 죽을 뻔한 고비를 낙법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나도 믿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10년 넘게 해왔던 운동을 그만둔 이유는 대학에서 읽은 책들 때문이었다.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이론서니 시집이니 감수성을 자극하는 책들을 읽다보니, 왠지 무도에서 풍기는 파시즘의 냄새가 그닥 유쾌해 보이지 않아서 운동을 멀리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요즘 대책없이 불어나는 살에 내 몸뚱어리 하나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느낌과 자꾸 쪼그라드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검도장을 찾았다. 검도장에는 보통 10년 이상 검도를 하신 분들이 수두룩했다.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격기인 데다가, 몇 가지 안 되는 단순한 동작에서도 10년 내공과 한 달 초심자의 차이는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지만 실제로 해보면 엄청난 격차가 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그 매력에 빠져 오랫동안 죽도를 잡고들 계신 것이었다.
여튼 이런 마음의 상황에서 책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포스트모던한 이론가들의 이론도 내 삶을 불안하게 할 뿐, 현실에서 그닥 적용하고 오랫동안 음미할 만한 글은 좀체 찾기도 어려웠고, 찾을 생각도 안 하던 차에 우치다 타츠루의 글은 그간의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어 내 눈을 끌었다.
오랫동안 무술을 한다는 것은 몸의 생리에 민감해지면서, 몸을 넘어서는 정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치다 타츠루의 현실감각은 바로 그 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치다 타츠루는 개념을 오랫동안 곱씹어 현실의 어떤 사건과 마주하여 생겨나는 깨달음(?)과 사유를 쓴다. 마치 검도의 머리치기를 하루에 오백 번씩, 십년한 사람이 실제의 대련에서 의식하지도 않은 사이, 일격필살의 기세로 쏜살같이 상대의 머리를 한 판 쳐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될라나.
그런 면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최근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거나, 스승이 없다는 식의 푸념에도 정신 번쩍드는 머리치기 한 방을 내리친다. 가령 스승에 관한 글에서 운전면허학원의 강사와 F1드라이버의 예를 든다. 만일 당신이 운전면허학원의 강사 옆에 앉아 한 달 동안 운전을 배우고, 슈마허 같은 전설적인 드라이버에게 1시간 운전을 배웠다고 한다면 누구를 스승이라고 할 것인가? 아마 운전면허학원의 강사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 슈마허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 차이를 타츠루는 배움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운전면허학원의 강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규격화된 기술을 전수할 뿐 그것을 넘어서는 운전의 본질 따위는 관심도 없고 가르쳐줄 수도 없다. 무엇보다 배우는 사람이 강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규격화된 면허증을 얻을 수 있는 기술이다. 그 이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반면 슈마허에게 배우는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면허증을 딸 수 있는 기술 따위가 아니다. 화려한 레이싱 기술? 아마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 최고 레이서의 어떤 정신 상태까지도 배우려고 할지 모른다. 우치다 타츠루는 일방적인 스승론을 뒤집어 배우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그 배움이란 도대체 무엇인지까지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스승이란 배우는 이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배우고자 하는 자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이성처럼 눈을 사로잡는 스승의 독특한 면모를 저마다 발견하여 그것을 배우고자 할 때, 비로소 스승은 ‘출현’하는 것이라고 나는 읽었다.
우치다 타츠루의 글은 쉬워 보이지만, 계속 곱씹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래 두고 볼 저자이다. 국내에 생각보다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어 놀랐고, 또 교육론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그러나 내가 읽은 우치다 타츠루는 단순히 기능적인 교육론과 사회개혁을 얘기하는 사람을 넘어, 몸의 문제에 누구보다 천착하고 있는 사람처럼 읽힌다. 몸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번번이 몸에 걸려 넘어지는 정신에 관해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 아닌가. 그래서 이 독특한 사상가의 글은 한동안 책상 위에서 곱씹어가며 읽을 듯하다. 이 양반이 쓴 ‘무도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아 아쉬운데, 누가 책 좀 내주면 안 될라나...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구하면서(인천에서는 생각처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도 함께 읽었는데 무척 현실적인 책이었다. 몇 백년 전 무사가 생각한 오륜서가 동양의 양대 병법서로 읽히는 까닭을 알 만했다. 봐주는 것도 없고, 오로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적을 베는 데 골몰한 이 고독한 무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쩝. 나도 진즉에 읽고 이놈저넘 안 봐주고 잔인하게 사는 건데... 사방이 적인 이 무사, 말년에는 동굴에 혼자 들어앉아 ‘오륜서’를 썼다고 하니, 그 명저보다도 참 외로웠겠다 싶다. 여튼 바로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쓴 책이 ‘오륜서’이니 검도란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운동이라고 하겠다. 사방이 적인 사람에게도 강추한다. 더불어 검의 양날 같은 우치다 타츠루와 미야모토 무사시를 여름 휴가 때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 밥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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