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 표지는 참으로 애매합니다. 책 내용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이냐고요? 생각해보세요. 고대 그리스 역사를 다루는 책에 로마 시대 유물 이미지를 표지에 쓴다면, 이건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책이 되는 것이니까요. 거기다가 해당 시대 활용할 만한 이미지 자료가 없다면, 그것도 참 괴로운 것이겠고요. 또 책에서 다루는 시기가 너무 방대할 때도 고민이 많아집니다. 어떤 이미지 자료를 메인으로 쓸 것인가에 따라 독자에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아, 물론 역사책이라고 구체적인 해당 시기 유물만을 대표적 표지 이미지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각’을 세우게 되긴 합니다. 그렇다구요.
이번 책은 고대 그리스(이 당시에는 그리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헬라스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고대 헬라스 시대라 표기했습니다.)의 역사가 투퀴디데스를 다룬 책입니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누구일까요?
그전에 우리 아주 짧고 굵게 역사 공부 해봅시다. 헤로도토스라는 사람, 옛날 세계사 수업 시간에 들어봤을 겁니다. 페르시아와 헬라스의 여러 폴리스가 함께 싸운 역사(‘페르시아 전쟁’이라 합니다)를 기록한 《역사》라는 책을 쓴 사람이지요. 영화 <300>이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했답니다. 이 책을 쓰고 나서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지요. 페르시아 전쟁 이후 고대 헬라스는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그 엄청난 제국 페르시아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폴리스들이 이들을 이겼으니, 자신들이 얼마나 대견했을까요. 그래서 이 시기 고대 헬라스 문명은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아테네)는 이들 폴리스 사이에서 맹주로 떠올랐고요. 그렇게 50년이 지나 이번에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폴리스)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한 동맹(후세 사람들은 이를 델로스 동맹이라 부릅니다.) 폴리스들이 맞붙습니다. 일종의 내전이지요. 이 전쟁을 일컬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27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투퀴디데스는 이 전쟁을 기록한 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역사가입니다.
헤로도토스는 투퀴디데스보다 조금 앞서 살았는데요, 그는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었죠. 주로 자신이 들은 이전 시대에 대한 이야기에 의지해 역사를 쓴 것이지요.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직접 장군으로 선출되어 참여하기도 합니다. 암피폴리스라는 곳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반역죄 선고를 받고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 듯합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바람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이 탄생을 했으니까요.
그는 이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사실에 대해 나는 내게 처음 알려진 대로 쓰거나 내 의견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나 남에게 들은 일을 모두 가능한 한 엄밀하게 검토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진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중략) 인간사는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게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이 책 덕분에 투퀴디데스는 최초의 과학적, 실증적 역사가로 이름을 날렸고, 헤로도토스보다 더 많이 역사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도널드 케이건은, 그런 투퀴디데스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도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 구애받는 한 인간이고, 그래서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지만 그 또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집필했다는 것이죠. 그것을 해당 시대의 또 다른 기록들, 그리고 투퀴디데스 자신의 글에서 삐거덕거리는 부분을 찾아서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당대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투퀴디데스와 다르게 사건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해석이 틀렸다고 생각한 투퀴디데스가 기록을 통해서 당대의 생각을 ‘수정’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투퀴디데스는 성공을 했습니다. 2,400년 동안 사람들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정설이라 생각해왔으니까요. 당대의 기억의 역사를 투퀴디데스는 기록의 역사를 통해 수정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수정한 역사는 무엇일까요? 궁금하신 분들은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역사에 잘 모르는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고대 헬라스 시대로 역사 여행을 떠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 책 덕분에 즐겁게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아, 표지 이야기 하려다 책 이야기만 해버렸습니다. 이런..
표지 시안은 네 가지였습니다. 디자이너 분이 자료를 찾느라 고생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딱 보기에 세 번째 표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쭈었지요. 누구 동상인가요? 시대만 맞으면 이대로 가요, 했더니, 확인 중이라고... 그리고 얼마 후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라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아, 역시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와 네 번째 시안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빈의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투퀴디데스 동상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안이 강렬하지만, 포즈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결국 마지막 표지가 승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승리, 하니까, 궁금하시 않으신가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누가 이겼는지. 이 전쟁의 승자는 스파르타입니다. 그리고 고대 헬라스는 서서히 몰락합니다. 아테나이의 몰락을 가져온 이 전쟁을 아테나이 사람인 투퀴디데스는 사실 끝까지 쓰지 못합니다. 아마도 죽었기 때문에 못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족처럼 하나 덧붙이면, 이 책을 읽다 보면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페리클레스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기억하는 저로선, 괜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투퀴디데스가 “영원한 유산”이 되길 바랐던 바로 그 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싶은 분은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을 강추하는 바입니다.
여기까지, B급 표지의 역사를 빙자한 책 소개, 이만 마칩니다.
- 벗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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