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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기억하고 싶은 책/휴머니스트 책Book

‘철학자’로 다시 돌아온 이진경을 만나다




철학자로 다시 돌아온 이진경을 만나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란 책으로 일약 사회과학계의 스타가 되었던 이진경은 사회주의가 몰락하던 1993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으로 혁명의 꿈이 무너진 일상을 다시 사유하는 철학자로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수유너머로 외부를 사유하는 코뮨을 만든 그는 일상에 아주 처절하게 깊이 뿌리박으면서 일련의 저작들을 발표한다. 그 사유의 결과물이 노마디즘이었다. 그런데 노마디즘을 내놓기 전 그를 철학자로 출발하게 했던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을 전면 개정한 철학의 모험을 내놓는다. 그 후 13년 만에 다시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으로 돌아왔다. 왜 히치하이커인가? 그리고 철학자 이진경은 왜 철학자로서 이름을 알린 첫 책을 20년 만에 새로 써서 독자들과 다시 만나고자 하는가? 도대체 그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1) 이 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3년 처음 펴낸 철학책인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이 그 모태가 되었는데요. 그사이 2000년에 철학의 모험으로 전면 개정해서 출간하셨고 20년 만에 또다시 전면 개정해서 독자들을 만나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책이란 그것이 쓰여질 때 제 신체에 다가왔던 수많은 것들, 예컨대 그때의 감정들, 그 감정을 낳은 사건이나 분쟁들, 그 전날 보았던 강렬한 그림과 그것이 남긴 감응, 며칠 전에 본 영화나 그날 아침에 들은 음악, 그리고 이틀 전에 만난 친구와 그에게서 들었던 말 등등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책에는 항상 그것이 탄생한 시간이, 그 시간의 감정과 감응이, 그 시간 속에 흘러들어온 사유와 개념들이 응결되어 있습니다. 역사성이란 어떤 책도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입니다.

영원불멸의 진리나 초월적인 도덕을 추구하는 철학은 대개 이런 숙명의 흔적을 지우며 쓰여집니다. 시간성의 흔적을 탈색시켜 초시간적인 어떤 것들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 흔적들의 빈자리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며 후학들이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 주길 기대하게 되죠.

하지만 저는 아무리 그렇게 해도 철학책 역시 그 시간에 모여든 것들, 책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외부들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제게 최초의 철학자로 다가왔던 맑스에게서 배웠던 것은 그 외부성을 통해 사고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책을 쓰는 경우에도 개념들 위에 채색된 역사적 흔적을 억지로 지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책을 무효화시키는 그 시간성을 떠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론적인 어떤 주장을 간결하게 제시해야 하는 책에선 많은 것들이 추상되고 사라집니다. 반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책, 대중들이 읽기 쉽게 써야하는 책들에는 그 시간의 흔적이 강하게 새겨집니다. 그것은 말투와 문장, 설명을 위해 선택한 사례 등이 당시의 시간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사실 시간의 흐름에 취약합니다. 당시엔 아방가르드적이었을 고다르의 영화조차 지금 보면 배우들의 복장이나 무대장치, 대사나 연기 등이 촌스럽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예전의 책을 다시 출판하기 위해 다시 손을 대야 하는 경우, 이런 느낌을 방치한 채 그냥 출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발생한 감각의 차이가 낳는 어색함과 불편함, 이것이 다시 쓰게 만드는 일차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나 더한다면, 가령 10년의 시간 동안 철학이나 어떤 철학자들에 대한 제 생각이나 지식이 적지 않게 달라졌다는 것 역시 다시 쓰는 고통을 감수하게 했던 이유였겠지요.

 



2)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 불을 붙였던 모습에 비하면 의외의 책이었는데요. 당시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울러 왜 철학입문서였나요?


그것은 제가 다른 책에서 썼던 것처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라는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사상이나 이론의 기반이 되어 주던 믿음의 붕괴, 더구나 그것은 제가 아는 맑스주의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붕괴였습니다. 맑스주의 이론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맑스주의의 역사였던 거죠. 따라서 맑스주의 안에는 자신의 역사조차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공백이 있었던 거라는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외부에서 내가 아는 맑스주의를 다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는 그 이론이 발딛고 있는 세계 자체 또한 다른 지반 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맑스주의 외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었지요. 철학은 단지 그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연구, 근대 수학사에 대한 공부 등등 여러 가지 공부를 했습니다. 대중적인 철학책은, 그렇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제 스스로 공부한 것을 대중과 나누고 싶었고, 그런 방식으로 제가 대중의 감각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3) 90년대의 이진경 선생을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표적인 철학입문서였는데요. 그렇다면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은 이 책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철학과 굴뚝청소부역시 근대철학사에 대해 제가 공부한 것을 정리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대중적인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서술방식에서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근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요약하며 제 해석을 섞어 넣으려 했다면, 이 책은 그들을 가상의 어떤 논쟁과 토론 속에서 서로 대면하고 대결시키며 그들의 개념이나 그들 간 사상적 차이 등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간결한 요약을 바탕으로 한 해석과 달리, 읽는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물음을 던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촉발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4)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은 철학하는 방법, 사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 같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사유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답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고 있는 대로 반응하죠. 상식과 양식, 통념, 이런 것들 속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생각하지 않고 기존에 알고 있는 것으로 답하며 반응할 뿐입니다. 정말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만났을 때지요. 상식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 양식을 곤혹이나 딜레마에 빠뜨리는 것들 말입니다.


지금 시대는 정보와 지식이 흘러넘치고, 그 네트워크를 통해 상식 이하의 것들에 대해 상식적인 판단들이 대중적으로 공유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만큼 사실 생각할 일 더 적어진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중지성이라는 말이 집합적 지성의 출현가능성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사실은 사유 없는 판단이 쉽게 전염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을 말해 주는 시대지요.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될 가능성이 유례없이 확대된 시대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답들을 공유하고 그것을 생각을 대신하여 판단하려는 건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합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피하지 말고, 답을 내기 곤혹스러운 사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생각을 시작하는 적극적 계기로 바꾸는 것, 이런 것이 더욱 더 중요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5) ‘히치하이커는 노마드를 연상시킵니다. 제목을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으로 정하신 이유도 그런 맥락에 서 있는 것인가요?


히치하이커가 노마드와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히치하이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노마디즘보다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대개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여행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직업적인 철학자들도 철학공부는 대개 다른 철학자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시작합니다. 심지어 대학 철학과의 대부분의 학위논문들은 어느 철학자에 대한 연구의 형식으로 씌어지지요.

철학자들이 자기의 철학을 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어떤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 없이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제대로 된 철학을 하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들에게조차 철학이란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그가 지나간 사유의 궤적을 따라 가는 여행인 셈입니다. 따라서 모든 철학자는 히치하이커로 시작한다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닌 경우라면 더 말할 게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려는 경우, 이해하기도 난감한 개념어들과 그것들이 얽히며 만들어지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따라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철학에 대한 입문서 성격의 책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겠지요. 입문서를 통해 공부하는 것, 그것 역시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여행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그저 얻어 타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거나 무익한 여행이 될 겁니다. 가이드를 따라가는 관광처럼, 그저 둘러봤다는 것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자신을 태워 이끌고 가는 이들에게 최대한 귀 기울이고 최대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생각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자신의 발과 몸으로 직접 답파해야 하는 오래된 여행의 스타일처럼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토론과 사고의 과정으로서의 히치하이킹 자체가 사실은 철학에 입문하는 길이고 철학을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6) 선생님의 저작들은 시대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사사방도 그랬고, ‘노마디즘이 나왔을 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번에 출간하신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이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도 논쟁하라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논쟁을 통해서 답(또는 합의)이라는 것이 나올까요?


예전엔 논쟁을 통해 생각이나 이론을 발전시키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논쟁이 벌어지면 대개 상대방을 반박하고 자신의 논지를 방어하게 됩니다. 비판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쟁이란 승패를 가리는 일종의 전투 같은 것이기에, 자신을 방어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논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일도 없습니다. 반대로 분열과 적대가 가속화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요, 특히 맑스주의자들은 상대방을 대개 기회주의자소부르주아지등 적대자로 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적대적인 관계가 급격히 강화되지요. 그래서 이전엔 동지나 친구였던 이들이 적대자가 됩니다. 저는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에 가슴 아프게 동의했던 일이 있었는데, 좌파가 분열로 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논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논쟁이란 결코 좋은 토론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논쟁을 걸고자 하지도 않았고 논쟁에 논쟁적인 방식으로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응답하고 싶었던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공격하는 건 차이를 긍정하는 방법이 아니란 생각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런 태도는 지금도 계속 견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은 토론의 형식을 빌려 쓰긴 했지만, 이는 상대방을 공격대상으로 간주하여 비난하는 논쟁의 형식과는 다르며, 더구나 이 책의 메시지가 논쟁하라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7)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을 읽다보면, ‘일상은 철학적 사유의 아주 중요한 촉발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진경 선생은 일상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일상, 그것은 우리의 삶이 진행되는 지금 여기를 뜻합니다. 삶이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삶 그 자체가 사실 목적이지요. 그 삶을 잘 사는 것, 그 삶의 과정을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해 말하고 사유하는 이유지요.


저는 철학이 이런 삶과 괴리되어선 안 되며, 거꾸로 이런 삶이 좋은 삶이 되도록 촉발하고 지혜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로-소피아’,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원래의 어원은 바로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상의 삶 속으로 철학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일상의 삶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최대한 가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그럴 때에만 철학적 사유는 일상 속에서 사유의 계기를 찾을 수 있고, 사유의 훈련을 할 수 있으며 적절한 사유의 대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구성되는 철학은 일상의 삶을 좀 더 좋은 것이 되게 만들고 그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책에서 철학적 개념을 다시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아니면 추상적으로 정의하는 철학적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들을 통해 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습니다.

 



8) ‘이진경하면 근대성, 탈주, 외부 등의 수식어가 떠오릅니다. 선생님을 관통하는 공부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최근의 공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시는지요?


근대성에 대한 연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그 뿌리에서부터 이해하고 싶다는 계보학적 물음 속에서 했던 것이고, 그런 물음을 던지거나 답을 찾기 위해서 탈주의 철학이나 외부성의 사유 같은 것을 제안하고 이용했던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탈주의 철학이나 외부성의 사유 같은 것은 사유의 방법론으로서 여전히 제 사고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주제는 근대성에 대한 것보다는 코뮌주의라는 긍정적 대안의 사유를 향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수자들이나 미천한 것’, ‘불온한 것’,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거나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삶, 좀 더 나은 사회를 사유하는 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이 요즘 제 공부를 방향 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