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가 하버드대 심리학과 건물에서 심리학 역사상 가장 재미있고 독창적인 실험을 한다. 바로 '투명 고릴라' 실험이다. 이 실험은 유투브에서 ‘투명한 고릴라’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험자들은 6명의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검은색 셔츠를, 다른 한 팀은 흰색 셔츠를 입혔다. 그리고 두 팀이 뒤섞여 농구공을 패스하게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흰색팀의 패스 횟수만 세도록 했다. 동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9초에 걸쳐 선수들 사이로 걸어들어 와 선수들 가운데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리고는 걸어 나갔다.
이 장면들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고 학생들에게 "고릴라를 봤느냐"고 묻자 실험 참가자 중 의 절반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왜 고릴라를 보지 못했을까?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다 열쇠를 어디에 두고 왔는지가 궁금하다. 열쇠가 없으면 내일 사무실 문을 열 수가 없다. 열쇠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 대체 어디에 두었을까를 생각한다. 이럴 땐 당연히 걸음의 속도를 늦추든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우리의 뇌는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기가 벅차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구단을 외는 것과 같이 평범하고 습관적인 작업은 우리의 뇌에 부담을 주지 않지만, 생소한 문제에 대해서 그 해법을 궁리해본다는 일은 만만치 않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런 고난도 정신적 작업을 접시돌리기와 같은 높은 위험 작업과 병행할 수는 없다. 망치질을 할 때 단 생각을 하면 손가락이 깨지기 십상이다. 구구단을 외면서 저글링을 할 수 있지만 미적분학을 공부하면서 저글링을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집중력은 한정되어 있어 동시에 두 작업을 원활하게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 부분에 주의력을 빼앗기면 예상치 못한 사물이 등장했을 때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부른다.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으로 인한 장님과 같은 시선, 무주의 맹시를 잘 보여주는 시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다. 그 한 구절을 보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시를 따라가보자. 사랑하는 님이 나에게 키스를 한다. 그것도 첫키스다. 얼마나 황홀하고 짜릿하고 달콤할 것인가? 나의 감각이 온통 그의 입술로 집중된다. 나의 눈과 귀를 비롯한 모든 감각기관이 그에게로 향한다. 내 귀가 온통 그녀의 목소리에 쏠려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뭐라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그의 꽃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떤 ‘고릴라’가 지나가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 우리를 눈멀게 하고, 사랑이 우리를 귀 멀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특정한 대상에게 온통 쏠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것, 향기로운 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다른 사람, 다른 사물이 눈에 보일 리 만무하다. 한용운은 바로 그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존재에게 온통 몸과 마음이 쏠려버린 자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한용운의 시가 말하는 무주의 맹시를 직접 실험해보기 위해선 일단 어떤 존재를 열렬하게 사랑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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