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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김보일|생각의 뭉게구름

마음이 보려고 해야 눈이 본다

 

 

 

 

어떤 사람은 야구를 재밌게 봅니다. 야구 선수 이름도 줄줄이 욉니다. 저 타자는 타율이 얼마고 출루율이 얼마인지도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포수, 투수, 유격수, 일루수, 외야수, 각 포지션의 선수들의 이름은 물론 그들의 실적까지도 마치 도표를 읽듯 훤히 알고 있습니다. 경기를 한 번 보고도 경기내용을 마치 해설가가 경기 내용을 전하듯 남들에게 생생하고 흥미롭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경기의 승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야구의 문외한들은 야구를 관람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야구를 본다고 하더라도 대체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든 장면 장면이 뒤죽박죽일 것입니다. 경기 내용을 기억해보라고 해도 전혀 기억을 해내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 두 사람이 똑같은 경기를 보고도 본 내용이 이렇게 다를까요? 이런 일은 현실에서 아주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형과 동생, 두 사람이 백화점에를 다녀왔습니다. 형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았니. 형은 운동기구와 스포츠 의류와 신발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형과 동생은 백화점에서 따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분명 둘이 같이 붙어 다녔습니다. 둘이 같이 붙어 다녔으면 본 것도 같아야 할 터인데 왜 이렇게 동생과 형의 본 것이 다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관심, 즉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죠. 관심과 욕망이 다르면 보는 것도 다릅니다. 형은 형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사물을 보았고, 동생은 동생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사물을 본 것이죠. 이런 사실은 다른 사람과 여행을 해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연을 즐기는 사람은 풍광이 수려한 캐나다와 뉴질랜드를 여행지로 택하겠지만 미술관 관람을 즐기는 사람은 프랑스나 뉴욕을 여행지로 택하겠지요. 어떻게 두 사람이 여행지로 프랑스를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풍광이 수려한 프로방스에를 가자고 할 것이고, 한 사람은 한 점의 미술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겠지요. 이렇게 욕망이 달라지면 보아야할 내용도 달라질 것입니다.

 

쇠똥구리에겐 쇠똥이 우선적으로 보이겠지만 꿀벌들에게는 꿀을 제공하는 꽃들이 먼저 보이겠지요. 유칼리나무 잎사귀만 먹는 코알라는 유칼리나무가 다른 식물보다 더 잘 보이겠고. 대나무 잎사귀만 먹는 팬더는 대나무가 다른 식물보다 더 잘 보이겠지요. 빛을 향하여 구부러지는 식물들의 굴광성(屈光性)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빛을 더 잘 감지할 수 있도록 자연이 설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 자기 목숨과 생명을 부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욕망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들의 눈은 그들이 욕망하는 것들을 잘 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제 친구가 서예역사상 퇴고의 대가라는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되는 ‘난정서’를 베껴 써보라고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서예 역사상 최고라는 글씨가 저에겐 그저 하나의 평범한 글씨로밖에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너 달 동안 이 삼십 번을 쓰고 나니 글씨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운이 생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신묘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 이래서 이것을 최고의 글씨라고 하는 것이구나, 어렴풋하게나마 글씨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 ‘필첨일호(筆尖一毫)’라고 해서 획을 시작할 때의 소위 기필(起筆) 부분에서의 바늘끝 같고, 터럭 같은 뾰족한 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글씨들에서 예전에 보이지 않던 미세한 선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왜 보이지 않던 선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저로 하여금 그 미세한 획들에 눈을 던지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욕망(慾望)’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글씨를 잘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왕희지의 글씨에 눈을 부릅뜨게 한 것이고, 그 결과 보이지 않던 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우리의 눈은 사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보려고 하는 마음, 보려고 하는 욕망이 먼저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일상에서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비비추’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늦봄에 연한 보라색 꽃을 피우는 이 식물은 도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식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꽃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노란색꽃을 피워내는 애기똥풀도, 개망초꽃도 주위에 아주 흔합니다. 등굣길에서 혹은 산책길에서 우리의 눈이 그것들 위를 분명 한번쯤은 스쳐 지나갔겠지만 우리는 그런 꽃들이 우리의 눈을 스쳐간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볼 마음, 볼 욕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은 무엇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먼저 무엇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의 눈은 비로소 그것을 봅니다. 바로 그것이 버스를 타면 예쁜 여자나 잘생긴 남자가 아주 잘 보이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