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처녀 때 남들보다 신경이 예민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소 무딘 편이었던 아내는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습니다. 아내는 아이가 자다가 조금만 부시럭대는 소리를 내도 벌떡 일어나 아이의 상태를 살핍니다. 남편의 눈에는 매일 똑같은 얼굴인데 아내는 아이의 얼굴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남편의 눈에는 그 모든 아내의 행동이 호들갑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내는 아기의 눈 밑을 들여다보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호통을 칩니다. 남편은 아기의 눈 밑을 들여다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기의 눈 밑에는 좁쌀보다 더 조그만 것들이 오돌토돌 돋아 있습니다. 대체 왜 아내에게 보이는 것들이 남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남편의 감각이 더 무뎌서일까요? 사랑이 부족해서일까요? 왜 매번 아내가 보는 것을 남편은 놓치는 것일까요?
남편이 잘 보는 것을 아내가 못 보는 경우도 흔합니다. 마치 몸속에 내비게이션을 내장한 것처럼 남편은 지리(地理)에 훤합니다. 안 가본 길도 잘 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길에 젬병입니다. 아내는 가본 길도 자꾸 잊어버립니다, 평균적으로 길과 공간에 대한 감각은 남편이 아내보다 탁월합니다. 형편없는 공간감각의 소유자, 소위 ‘길치’는 남자에게서보다 여자에게서 더 흔합니다.
왜 아내가 잘 보는 것을 남편이 잘 보지 못하고, 남편이 잘 보는 것을 아내가 잘 보지 못하는 걸까요? 세상과 사물을 보는 데도 성차(性差)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과학자들은 암컷 쥐의 모성적 행동(새끼를 보살피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모성적 행동을 유발하는 ‘메스트’, ‘Peg3’ 등으로 알려진 이 유전자들에 변화를 주면 암컷 쥐는 모성적 행동을 하는 데 장애를 보인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새끼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사라지는 거죠.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새끼가 아프다고 낑낑거려도 세상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비정한 엄마가 되는 것이죠. 2001년 미국 듀크대 연구팀은 ‘Peg3’ 유전자가 사람에게서도 발견되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모성적 행동을 유발하는 ‘메스트’ , ‘Peg3’ 는 쥐로 하여금 새끼를 더 잘 보도록, 더 세세하게 보도록 만드는 물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일 필요가 생기게 되었을 때, 아내의 몸을 아이에게 젖을 주는 수유(授乳)에 몸이 맞도록 하기 위해 아내의 몸에서는 어떤 호르몬이 분비되었을 것입니다. 그 호르몬의 덕으로 아내의 가슴은 한 생명을 먹여 살리는 생육의 자원창고가 되었고, 그 호르몬 덕분에 아내는 조그만 부스럭거림에도 벌떡 깨어나게 되었고, 아기의 상처를 남들보다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내의 몸에서 일어나게 된 이 작지만 커다란 변화, 이것이 생명을 나게 해서 자라게 하는 자연의 이치겠지요.
그렇다면 왜 남편은 아내보다 더 좋은 내비게이션을 몸에 장착하게 된 것일까요? 왜 아내보다 남편이 더 공간과 길에 대한 감각이 예민할까요?
오랫동안 남편은 사냥꾼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목표물을 추적하다 보면 거주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질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냥감을 쫓는 길도, 포획한 사냥감을 메고 집을 찾아가는 길도 멀고 험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사냥꾼에게 공간감각은 필수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남성들이 공간을 여성들보다 잘 보는 것, 공간감각에 있어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탁월한 것도 수만 년 동안 사냥꾼으로서의 역할을 해온 남성들의 경험이 인간의 몸에 각인된 결과라고 할 수가 있겠죠.
사냥감을 향해 창을 겨누고, 거리를 계산하고 정확하게 사냥감의 심장을 향해서 창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은 훌륭한 사냥꾼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사냥이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몫이었다면 이런 능력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에게 더 필요한 능력이었겠죠. 일반적으로 계산하는 능력, 수리능력이 남성보다 여성들보다 뛰어난 것도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이 인간의 몸에 각인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면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없겠죠. 때를 놓치지 않고 창을 사냥감의 심장에 정확하게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단호함과 비정함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동정과 눈물은 금물이죠. 양육자로서보다 사냥꾼으로의 역할을 해온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단호함과 비정함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사냥꾼에게는 상황을 판단하고 계산할 수 있는 수리적 능력과 단호함과 비정함이 필요하겠지만 양육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기, 즉 피양육자와 나누는 공감의 마음이겠죠.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감수성, 이것이 ‘같이 느끼는 마음’, 공감(共感)입니다. 엄마의 마음과 아기의 몸이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공감은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마음의 탯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아프면 아기의 고통이 이 ‘마음의 탯줄’을 통해 엄마의 마음에 전해집니다. 여성호르몬이 여성의 특징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여성의 가장 특징적인 마음, 공감 또한 여성호르몬이 관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몸이 아프다, 목이 마르다. 기저귀를 갈아달라,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니 엄마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는 큰소리로 울면서 나에게 지금 어떤 변화가 있으니 살펴달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의 울음은 엄마에게 보내는 일종의 구원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죠. 쾌적하지 않을 때 아기가 울면 엄마는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먹인다든지, 기저귀를 간다든지 하여 아이를 쾌적한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이를 어르며 달래주는 엄마에게서 아이는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안정감을 누릴 수가 있지요. 바로 그 안정감이 한 사람됨의 뿌리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 차분한 안정감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아이의 고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곧, 공감입니다.
물론 공감이라는 감수성이 여성호르몬을 독점적으로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호르몬이 공감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데 작지만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죠.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마치 나의 몸처럼 타인의 몸에도 마음을 쓸줄 아는 배려심,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요람을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뛰고 생각할 수 있는 개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나의 아픔과 상처를 간과하지 않고 세세하게 볼 줄 아는 어미의 눈, 바로 그 눈 덕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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