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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작가共방/하승창|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정점, 2000년 총선연대 Ⅰ

 

 

 

 

 

1) 두 번의 변곡점

 

최근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에 대한 촛불시위를 주최하고 만들어가느라 연일 정신이 없다. 글을 쓰는 오늘도 촛불시위가 있었으니, 이번 주도 시민단체들은 촛불시위를 준비하고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연일 촛불시위가 있었을 때 나도 시민단체들의 연대기구인 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것이 생각난다. 이렇게 큰 사건들에 대응하고 있을 때에는 그럴 일이 적지만 상대적으로 덜 했던 2000년대 중반엔 요즘 시민단체들 뭐해?” 하는 질문을 많이도 들었다. 그 외에도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면 으레 듣는 질문 몇 가지가 있다. 생활이 되느냐?”라는 것이 제일 많은 질문이고, 정치할 거냐?” 많이 듣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시민운동을 하는 개인에게 하는 질문이다. 요새 시민단체들 뭐해?”라고 묻는 말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시민단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존재감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무언가 무렵부터는 갑자기 활동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궁금증이기도 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민단체들의 활동 자체가 특별히 줄어들거나 중단되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 이런 질문들이 나오게 된 걸까? 지금 순간에도 박봉이지만 촛불시위 외에도 우리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며 밤늦도록 일하는 시민단체 상근자들이 많다.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들이 나오는 것은 19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이후 시민단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좀 달라진 탓이 아닐까 싶다.

 

 

그림 하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이것은한국NGO리포트 2004(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에 실린 5대 일간지 시민단체 보도량 추이를 그래프로 다시 그려본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주요 일간지 다섯 군데의 기사를 시민단체시민운동이란 키워드와 주요한 단체 몇 군데의 이름으로 검색한 결과이다. 여기서 주요한 단체들은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YMCA199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들어봤음 직한 단체들이다. 실제로 이 단체들은 199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고, 2000년 총선연대 활동까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사회적 성과를 낸 단체들이고 지금도 여전히 시민단체들의 중심 역할을 하는 단체들이다.

 

 

표를 보면 2000년까지는 두 키워드가 같은 기울기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지만 2000년부터 2004년 무렵까지는 두 키워드 모두 하강하다가 2004년에 한 곡선은 반등하고 다른 한 곡선은 여전히 하강하는 것이 보인다. 반등하는 곡선은 시민단체시민운동으로 검색한 경우이고, 여전히 하강하는 곡선은 주요 단체의 이름으로 검색한 경우이다.

 

 

이렇게 곡선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2004년 무렵에서야 엇갈리게 된 걸까? 이 그래프에 2000년대에 시민운동의 변화가 숨어 있다. 단순하게 보면 요즘 시민단체들 뭐해?”라는 질문에는 시민단체들 별 활동 없던데…….”라는 인식이 담겨 시민단체들이 쇠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무엇을 중심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민운동은 그래프에 보이는 두 번의 변곡점이 있는 시기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도 있다.

 

 

 

2)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정점, 2000년 총선연대

 

우선 2000년 이후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적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째는 2000년 이후 시민단체에 보내던 언론과 정치권의 우호적 태도가 사라진다. 기존 주요 일간지들의 경우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보도하는 지면을 대폭 줄이게 된다. 1990년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영향력이 있게 된 배경 중의 하나가 언론들의 우호적 보도 태도였는데, 갑자기 관련 지면을 줄이게 되니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자연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90년대 주요시민단체들은 거의 모든 언론과 공동 캠페인을 진행했다. 조선일보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1990년대 대부분의 일간지에는 엔지오란이 따로 있었다. 아예 한 면을 다 배분하여 일주일에 한 번 엔지오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전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정도였다. 시민단체들의 특성상 캠페인을 일주일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장기적인 프로그램들이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시민단체 내부의 인사이동까지 소식으로 전해줄 정도로 자세하게 시민단체들 이야기를 전해주는 공간이 되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하나가 신임 경실련 사무총장이 신문사 편집국장을 만나고 왔더니 다음날 신문에 경실련 사무총장 본사 내방이라는 동정 소식이 실리기도 했던 적도 있고, 필자가 경실련 조직국장에서 정책실장으로 부서를 옮기니까 인사 동정란에 실리는 경험도 했던 시기였다. 그만큼 시민단체들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되고 또 언론이 시민단체들을 그만큼 독자들과 가깝게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 지면들이 2000년 이후 거짓말처럼 일시에 사라지고 한겨레신문의 엔지오 동정란 정도가 남게 되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기존 언론이 이런 조처를 한 배경에는 시민단체들의 2000년 총선연대 활동이 있다. 2000년 총선연대 활동은 1990년대 시민단체 활동의 정점이었다. 그래프를 봐도 변곡점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의회에서의 폭력은 과거보다 줄었다 하나 요즘도 여전하고 거기에 성추행이니 누드사진 검색이니 논문 표절이니 하는 사안들이 국회의원의 자질과 관련해 많이 거론되는데, 1990년대에도 뇌물 등의 부정부패, 의회에서의 폭력, 거기다 막말까지 도대체 국회의원으로 뽑은 사람 맞나 싶을 정도의 질 낮은 의원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높았다. 정치의 수준을 일반 유권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 정치문화의 개혁을 위해 더는 수준 낮은 정치인을 뽑지 말자고 시민단체들이 나서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유권자들의 호응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냈다. 20001월 몇몇 주요 단체가 낙선운동을 선언한 순간 순식간에 전국 1,000여 개의 단체가 총선연대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표해 왔다. 당시 비영리단체의 숫자가 비공식조사로(시민의신문) 25,000개 정도이고, 그중에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를 감시하는 단체의 숫자는 수천 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거의 전국의 모든 단체가 가입했다고 해도 과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또 실제 결과도로 낙선 대상자로 선정된 후보들이 수도권에서도 90%가 넘는 낙선율을 기록하면서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더욱 주목하게 만들었다.

 

낙선운동 결과

후원금 현황

홈페이지 기록

전국 낙선율: 68.6%(59)

수도권: 95%(20명 중 19)

중부권: 78.3%(23명 중 18)

호남권: 75%(8명 중 6)

영남권: 45.7%(35명 중 16)

 

총 후원인수: 5667

총 모금액: 350,191,652

총 지출액: 328,851,681

 

총 접속건수: 856,090

1일 평균: 10,569

게시판 기록: 45,674

 

 

 

출처: 90년대 중앙집중형 시민운동의 한계와 변화에 관한 연구, 하승창, 2006

2000년 총선시민연대, 2001, 총선연대백서에서 재구성한 것으로 2000112일 발족 후 412일까지의 기록임

 

 

 

 

이러다 보니 1990년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점점 커지면서 이제 정치개혁이라는 과제까지 시민단체들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정치권에 나타나게 되었다. ? 시민단체들의 활동으로 실제 낙선되니까. 정치권의 우호적 태도는 경계로 바뀌었고,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대한 견제도 나타났다.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시민단체들에게 정부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도 나왔다. 심재철 의원은 시민방송 RTV가 편향적인 방송을 한다며 방송통신위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 이후 지원금이 끊긴 시민방송은 근근이 유지해오다 최근 뉴스타파가 시민방송을 통해 송출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묵혀두었다가 뒤늦게 벌어진 일도 있다. 낙선운동으로 떨어졌던 새누리당의 이사철 의원은 2008년 총선에서 국회로 복귀하게 되자 국회 예결위에서 정부 지원을 받는 시민단체 1,000개를 감사하자고 주장한다. 나름 복수였는지 모르지만, 이 주장은 자신이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면 총선연대에 참여한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정부 지원을 받지 않거나, 받는다 하더라도 소액의 프로젝트 지원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언론대로 시민단체들의 영향력에 놀라면서 시민단체들의 다음 사회개혁과제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총선연대활동이 마무리되면서 이렇게 모인 시민단체들이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연대기구를 만들어 공동의 활동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졌다. 당시에 한국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라고 1990년대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했던 초창기 시민단체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국연대기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민협까지 합류하는 것으로 해서 총선연대에 참여했던 단체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시민단체연대회의라는 전국적 연대기구가 만들어졌다. 현재 서울시장인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초대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연대회의의 첫 번째 공동의 과제는 언론개혁인가, 정치개혁을 이어갈 것인가였다. 언론단체들을 중심으로 해서 언론개혁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제기가 있었지만 공동의 과제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언론개혁 과제는 안티조선운동과 바른언론시민연합 등으로 다양하게 생겨났고, 특히 안티조선운동은 언론개혁운동의 중심적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자신을 개혁 대상으로 보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곱게 없는 언론들은 무렵부터 시민단체들의 긍정적 활동내용을 보도하기보다 집중적으로 시민단체들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경실련의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사건 당시 한겨레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이름으로 시민운동의 문제를 짚은 이후 다시 시민단체들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그렇게 제기된 문제 총선연대 활동을 격려하고 칭찬하던 언론들이 반대로 총선연대 활동이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했다는 진단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총선연대 활동의 정당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논란은 단순히 정치권이나 언론의 시민운동에 대한 공세로만 그치지 않았다. 총선연대를 둘러싼 시민운동 내부의 논쟁으로 이어져 정치적 지향이 다른 시민운동이 시작되어 소위 뉴라이트라 불리는 보수적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란은 총선연대 활동이 끝나고 시민운동 내부에서 경실련 사무총장 출신 서경석 목사나 이석연 변호사 등이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란을 시작으로 해서 1990년대 내내 시민운동의 활동방향은 단일한 것처럼 보였던 흐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징후는 사실 총선연대를 발족할 때부터 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