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외조부 안종약 공은 귀신의 형상을 잘 알아보았다. 하루는 이웃 고을 관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사냥개가 정원에 있는 큰 나무를 보고 계속 짖어댔다. 공이 돌아보니 높은 갓을 쓴 얼굴이 큰 괴물이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안 공이 뚫어지게 바라보니 그 괴물이 점차 사라져갔다. 또 하늘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공이 변소에 가려고 어린 종에게 등촉을 들려 앞세워 가는데, 대숲에 한 여자가 붉은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푼 채 앉아 있었다. 공이 곧장 그 앞으로 가니 여자가 담을 넘어 달아났다.
― 「귀신을 본 안씨 가문 사람들」
2.
길옆에 고목 한 그루가 있었는데, 둘레가 몇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날이 흐리면 귀신이 꼭 휘파람을 불었고, 밤이 되면 불을 켜놓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공이 매를 풀어 꿩사냥을 하는데, 매가 그쪽 수풀에 들어가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한 소년이 자신의 용기만을 믿고 가서 그 나무를 자르려다가 그 귀신이 붙어 밤낮으로 미쳐 날뛰었다. 공이 그 집에 가서 문밖의 평상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소년의 머리털을 낚아채 끌어내니 소년은 사색이 되어 애걸했다.
공이 “너는 200여 년 동안 이 마을에 있으면서 밤에는 불을 켜놓고 해괴한 짓을 하고, 내가 지나가도 불손하게 걸터앉아 있으며 매를 풀어놓으면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이웃집을 괴롭히니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느냐?”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소년이 이마를 땅에 대고 공손히 사죄했다. 공이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가지를 잘라 장도를 만들어 그의 목을 베는 시늉을 하자 소년이 몸을 뒤집고 울부짖으며 죽은 것처럼 땅에 엎어져 깊은 잠에 빠졌다가 사흘 만에 비로소 깨어났는데, 미치광이 증세가 홀연 사라졌다.
― 「귀신을 본 안씨 가문 사람들」
3.
이웃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안주인이 귀한 비녀를 잃어버리고는 항상 계집종을 매질했다. 계집종이 그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귀신에게 와서 물으니 귀신이 “비녀가 있는 곳을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너에게 말하기는 곤란하다. 네 주인이 오면 말해주겠다”라고 했다. 종이 가서 부인에게 고하니 부인이 직접 곡식을 가지고 와서 점을 쳤다. 귀신이 “내가 비녀 있는 곳을 알고 있지만 차마 말하기 어렵다. 내가 입을 한 번 놀리면 당신이 매우 무안할 것이다”라고 했다. 부인이 재차 물어보았지만 귀신이 끝내 답을 하지 않자 부인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러자 귀신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무 날 저녁에 당신이 이웃집 아무개와 같이 닥나무 밭에 가지 않았는가? 비녀는 거기 나뭇가지에 걸려 있네!”라고 했다. 계집종이 가서 비녀를 찾아오자 부인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 「성현의 외가 정씨 가문에 살던 귀신」
4.
이웃들에게 소문을 들으니, 어떤 어린 종이 문밖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종의 등에 들러붙었다고 한다. 무거워 견딜 수 없어서 당황해 집으로 들어가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물건이 떨어졌는데, 땀이 온몸을 적셨다고 한다. 이후로도 괴이한 일이 많았다. 밥을 지으려고 하면 솥뚜껑은 그대로 덮여 있는데 솥에 똥이 가득 차 있고 밥알은 뜰에 흩어지기도 하고, 혹은 소반과 사발을 집어 공중에 던지기도 하고, 혹은 큰 솥을 들어 공중에 돌리다가 치니 그 소리가 큰 종소리 같기도 했다.
혹은 채마 밭의 채소를 몽땅 파서 거꾸로 심어놓아 삽시간에 말라버리게 하는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혹은 옷장을 자물쇠로 잠가 놓았는데, 옷을 모두 꺼내어 들보 위에 늘어놓고 그 옷마다 전부 올챙이 모양의 전서 같은 글씨로 이름을 적어놓은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혹은 사람도 없는 아궁이에서 갑자기 불꽃이 번득이는데, 누가 불을 끄면 문간방으로 불이 옮겨붙어 몽땅 태워버리는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집을 버리고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 「기건과 이두의 집에 붙은 귀신들」
5.
내가 젊었을 때 남강(북한강)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생서 남쪽 고개에 이르렀을 때이다. 마침 보슬비가 내렸는데 말이 입에 거품을 물고 앞으로 가지를 못했다. 문득 따뜻한 기운이 불처럼 얼굴을 스쳤고, 또 나쁜 기운이 나타나 견딜 수가 없었다. 길옆의 동쪽 골짜기를 보니 어떤 사람이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있었는데, 키가 수십 장(丈)이고 얼굴은 소반처럼 넓으며 눈은 횃불과 같으니, 기궤한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기를 ‘만약 정신을 놓으면 반드시 저놈의 꾀에 빠질 것이다’ 했다. 그래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서서 한참을 노려보니, 그 사람이 문득 머리를 돌리고 하늘을 향해 점점 사라지더니 공중으로 올라가버렸다.
― 「성현이 본 귀신」
《용재총화》에서
더 많은 흥미로운 내용들을 만나 보세요! :)
'H_기억하고 싶은 책 > 휴머니스트 책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정일·최재천의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10주년 기념판 (0) | 2015.12.08 |
---|---|
《원순씨 배낭 메고 어디 가세요?》(하승창, 박원순 지음) 북토크쇼 다시보기 (0) | 2015.12.08 |
[책 미리보기]《프랑켄슈타인의 고양이》 #5. 형광 물고기를 찾아서 (1) | 2015.10.23 |
[책 미리보기]《프랑켄슈타인의 고양이》 #4. 현대판 노아의 방주 (0) | 2015.10.22 |
[책 미리보기]《프랑켄슈타인의 고양이》 #3. 약품을 만드는 염소 (0) | 201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