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2015 박시백의 조조록

'사도세자의 비극' 영조-사도-정조 3대 가족관계도


500년 조선왕실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비극으로

꼽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은 왜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고,

끝내는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것일까요?


영조-사도세자-정조에 이르는 삼대와 관련 인물들의

가족관계도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한눈에 만나 보세요!




영조 (1694~1776)

 

조선 제21대 왕.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숙빈 최씨다. 1699년 연잉군에 봉해졌다. 숙종 말년에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과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의 대립을 겪었다. 경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721년 노론의 주도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곧이어 노론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면서 신임옥사가 일어나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1724년 경종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탕평을 기치로 내세워 즉위 직후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소론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노론의 전제를 막았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 대신들을 파직하고 소론을 등용했다. 1728년 소론의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도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를 고르게 등용해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후에도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영조의 자기 신원이라는 목적이 개입되면서 노론 편중으로 흘렀지만, 탕평에 대한 영조의 노력과 성과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건저와 대리, 삼수의 옥, 독살설,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점 때문에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도세자 비극의 시발점이 된 선위 소동, 비극을 키운 대리청정도 그러한 시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신하들이 상대하기 힘들 만큼 학문 수준이 높았고, 저작물도 많이 남겼다. 눈물이 많고 다혈질이었으며 변덕이 심해 즉흥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냉정할 만큼 이성적이고 계획적이어서 모든 것이 철저히 정치적이었다. 영조는 조선의 왕들 중 가장 오래 살았고, 또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자질도 우수했고,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등 자세도 훌륭해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




영빈 이씨 (1696~1764)


조선 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다. 어려서부터 궁녀 생활을 하다 영조의 눈에 들어 1726년 귀인이 되었으며, 1730년 영빈으로 봉해졌다. 1762년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이 심해져 파국으로 치달을 때 사도세자의 단죄를 청함으로써 사사의 명분을 제공했다. 사도세자가 죽고 2년 만에 그녀도 세상을 뜨자 영조가 매우 슬퍼하며 후궁 중에서 가장 높은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사도세자 (1735~1762)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다. 비는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다. 서른다섯 살에 효장세자를 잃은 영조가 마흔두 살에 얻은 아들이어서 태어난 그날로 원자의 명호를 받았다.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4년 왕세자빈을 맞았다. 어려서는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일찍부터 영조와 떨어져 살아 부자의 정을 쌓지 못했다.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책보다 무예를 더 좋아해 영조를 실망시켰다. 열다섯 살이 되던 1749년 대리청정을 시작한 초기에는 당당한 체구에 위엄 있는 눈빛과 목소리까지 갖춰 신하들이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러나 다혈질에 변덕도 심한 영조의 미움과 멸시가 가득 담긴 질책이 반복되면서 병을 얻었다.


자신이 어렵게 이룬 정치적 안정과 튼튼한 왕권을 유지해나갈 후계자를 원했던 영조는 그런 모습에 더욱 실망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해 잡희와 사냥 등에 열중하며 별것 아닌 일로 칼을 휘두르는 등 사람을 쉽게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762년 왕세자가 반역을 꾀한다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뒤 아버지와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면서 광기를 보이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고발이라는 형식을 빌려 영조가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끝내 자결하지 않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죽은 뒤 바로 사도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 1899년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혜경궁 홍씨 (1735~1815)

 

사도세자의 비. 홍봉한의 딸이다. 1744년 열 살에 사도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 홍봉한은 영조의 신임을 받아 세력이 커졌으나,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결국 1762년 영조와의 갈등 끝에 광기를 보이던 남편이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의 주도로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는 영조가 혜빈의 호를 내리면서 보호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이라는 궁호를 받으면서 더욱 지위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비극을 주도한 친정에 대한 탄핵이 이어지자 친정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정조를 압박하기도 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예순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오라비 홍낙임이 벽파의 공격을 받아 사사되고 친정이 거의 몰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행여 대왕대비의 미움을 살까 봐 매우 조심하며 살아야 했다. 1805년 예순대비가 죽은 뒤에야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며, 친정을 시작한 순조에게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한 일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들려주었다. 1795년 환갑을 맞아 쓰기 시작해 완성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도 자신과 친정 가문의 명예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왜곡된 부분도 있다.




홍봉한 (1713~1778)

 

조선 후기의 문신.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다. 즉위한 이후 내내 탕평책을 펼친 끝에 척신에게 주목한 영조에 의해 노론의 최강 실세로 자리잡았다. 1762년 왕세자 제거를 결심한 왕의 뜻에 적극 동조했으며, 왕세손(정조)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이후로도 오랫동안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정조 (1752~1800)


조선 제22대 왕.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도세자이고, 어머니는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다. 1759년 왕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참혹한 일을 겪었음에도 반듯한 자세에 성실한 공부와 빼어난 식견, 지극한 효성까지 보여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1775년 대리청정을 맡았으며,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즉위하자마자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추존했으며, 더불어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높이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평생 책과 붓을 손에서 놓지 않은 학자이기도 해서 신하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느 왕보다도 정사에 성실했으나 아버지 사도세자의 일에 너무 매달렸고, 그로 인해 탕평정책이 파탄되고 급기야는 척신정치의 배격이라는 자신의 기본 정치철학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1786년 다섯 살인 문효세자를 잃고, 1790년 화성 행궁이 완성된 직후 태어난 원자가 열다섯 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준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내려가 지내기 위해 행궁이 있는 화성에 성곽을 세우고 자신과 어린 왕을 호위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했다. 그러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1800년 원자를 세자에 책봉하고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내정함으로써 그토록 혐오했던 척신정치의 부활을 초래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곧이어 노론 벽파를 향한 경고의 뜻을 담은 오회연교를 내린 뒤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한 달 뒤 세상을 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더 많은 흥미로운 내용들을 만나 보세요! :)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