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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Hustory

종횡무진 남경태, 우주의 어느 별에서 수다를 떨다 [대단한 저자 '김학원X남경태']


대단한 저자, 지구에서 아주 드문 저자 종횡무진 남경태,

우주의 어느 별에서 수다를 떨다



2014년 성탄절 전야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오후 1시 15분, 그가 눈을 감았다. 투병을 시작한 지 1년여, 병마와의 사투 과정에서도 집필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가 저서 36종 40권, 번역서 99종 106권, 총 146권의 책을 세상에 남겨 놓고 쉰넷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편집자가 가장 사랑한 저자  

출판사 편집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저자는 어떤 유형의 저자일까? 첫째, 글을 잘 쓰는 저자다. 둘째는 약속을 잘 지키는 저자, 원고 마감을 지키는 저자다. 셋째, 편집자를 파트너로 인정해 주는 저자이다.

그는 늘 편집자에게 약속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편집자가 난처하지 않도록 배려했고 심지어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상대방이 혹시나 불편할 게 느낄 수 있는 상황조차 만들지 않도록 주의했다.

남 선배가 편집자에게 감동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 주는 때가 있다. 바로 ‘약속한 날’에  ‘완전한 원고’를 보내는 일이다. 그와 작업해 본 대한민국 편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일이다. 사실 그렇다. 감동과 당혹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왜? ‘완전한 원고’란 탈고 상태의 원고를 말한다. 편집자들은 그 원고를 관념적으로는 ‘완전한 원고’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초고’라 여긴다. ‘완전한 원고’ 대부분은 초고다. 그런데 남 선배가 약속한 날에 보낸 원고는 실제로 ‘완전한 원고’다. 그러니 당혹할 수밖에. 

그가 떠난 후에야 고백하지만, 남 선배는 결정적으로 편집자를 불편하게 했다. 편집자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1) 아주 잘 쓴, 2) 완전한 원고를, 3) 약속한 날짜에 보내준 ‘가장 만나고 싶은 저자’를 현실에서 마주하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사전을 외우고 사전을 쓴 저자 

모든 저자는 다 다르다. 다른 이의 저작들을 읽는 습관, 방식도 저마다 다른데 남 선배는 그중에서도 아주 독특했다.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저자다. 각종 사전을 주변에 쌓아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는 저자들은 많다. 그런데 단행본도 아니고 사전을 소설책 보듯 ㄱ에서 ㅎ까지, a에서 z까지 읽어 내려가는 저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여러 출판사의 영어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판본을 비교해 가며 읽었다. 그때마다 가졌던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남 선배는 사전을 읽으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혁신해야 할 요소를 찾아낸다. 사전을 그냥 쪼개진 정보로 당장 소비해 버리지 않는다. 맥락으로 읽는다. 

그는 사전을 썼다. ‘인터넷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생생한 지식의 보물 창고’라는 부제를 단 《개념어 사전》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이 책의 개정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 개인이 ‘사전’이라는 제목을 단 책을 펴냈다면 둘 중 하나다.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려 할 만큼 무모하거나, 아니면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 수 있을 만큼 뻥이 세거나. 하지만 이 책의 제목 앞에 생략된 문구를 밝히면 면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지은이가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 이것이 이 책의 원제목이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의 기록에 필요한 숫자, 인명과 지명 등 수많은 고유 명사는 물론 우리나라 가수들의 태어난 해와 신작 발표의 시기까지 줄줄 외는 저자와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신기하고 유쾌할까? 그와 만나면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다. 네이버보다 빠르고 생생하다.


개념어 사전 - 인터넷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생생한 지식의 보물 창고 (2012)

    개념어 사전 - 인터넷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생생한 지식의 보물 창고》 (2012)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모두 집필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저자 

그는 종종 스스로를 ‘야매 학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른바 ‘근본이 없는’ 그의 글쓰기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자신의 눈과 목소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만의 체취와 향기를 고집했다. 책이 책일 수 있는 핵심 가치를 그는 마지막까지 강변했다.   


지금까지 인문학을 주제로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더 많은 책을 번역했다. 그러나 이 종횡무진 시리즈만큼 애정과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인 책은 없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를 한 사람의 저자가 책으로 엮어 낸 사례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그런 형식적인 특징에 만족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이 시리즈에서 한 사람의 저가가 가진 일관된 사관과 역사 서술을 읽어 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감이나 비판의 시선을 던져 주기를 바란다. 지은이의 향기가 나지 않는 책은 가치가 없고, 좋은 텍스트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지은이의 향기가 진하다.


일부 중략한 이 글은 ‘종횡무진 시리즈’의 개정판 머리말의 마지막 대목이다. 지난 2014년 12월 8일, 그가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쓴 마지막 글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독자들은 이 종횡무진 시리즈에서 지은이의 체취를 느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지막 문장에는 아침 이슬이 맺힌 꽃잎처럼 그의 젖은 눈망울이 스며있다.

그는 언제나 언쟁을 경계했지만 논쟁을 회피하지 않았고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 수다를 더 좋아했다. 그 화려한 수다의 모든 것은 단연 ‘종횡무진 시리즈’에 담겨있다. 무려 2백 자 원고지 1만 7천 매에 달하는 분량으로 한 사람의 눈과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종횡무진 한국사 1, 2》, 《종횡무진 동양사》, 《종횡무진 서양사 1, 2》로 풀어냈다. 실제로 그는 평소에 여러 차례 말했다. “지구상에서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한 사람이 한 인간의 눈으로 풀어 쓴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이 말을 할 때면 그는 순진함을 넘어 ‘빨리 맞장구쳐 달라’는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상대방을 쳐다보곤 했다. 

《종횡무진 한국사 1, 2》, 《종횡무진 동양사》, 《종횡무진 서양사 1, 2》 (2015 개정판)



미완의 유작 ‘지구본 가지고 놀기’, 지구 밖 우주의 별에서 탈고하다

그는 2014년 12월 23일, 쉰넷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총 135종 146권의 책을 펴냈다. 그의 이름으로 첫 책이 출간된 것이 1994년이었으니 불과 20년 사이에 145권의 책을 펴낸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 여덟 시간 저작과 번역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은 바둑을 두었으며, 음악에 몰두하기도 했고, 7년 동안 매주 <타박타박 세계사>라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여 오락이나 시사가 아닌 지식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드물게 청취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공로로 2013년 MBC 연예대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출판계, 방송계의 여러 지인과 수다 떤 시간은 또 얼마였던가? 그 시간들을 모두 빼면 불과 채 10년을 넘지 않는 기간 동안 146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셈이다. 저서만이 아니라 번역서도 만만한 책은 없었다. 예컨대 《비잔티움 연대기》는 원고지 8만 매, 총 2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로 10년 동안 이 번역 작업만 마쳐도 평생의 대작이라 일컬을 만한 작업이었다. 그가 펴낸 146권은 책의 쪽수로 치면 아주 낮게 잡아 권당 3백 쪽으로 쳐도 5만 6천 쪽, 어림잡아 원고지 22만 매가 넘는, 실로 어마어마한 지적 노동의 결실이었다.

그는 별이 되고 싶어 했다. 실제로 지구본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지구본을 돌리며 지구에서 바라본 별과 지구 밖의 어느 별에서 본 지구 두 가지 시선을 다 즐겼던 같다. 재작년 어느 날이었다. 남 선배와 편집자들이 수다를 떨다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 선배의 수다를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지구본 가지고 놀기’라는 책을 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3백 매 정도의 초고를 썼을 무렵, 병마가 깊숙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의 과정은 공개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간간히 쓴 편집 일기 속에만 존재하는 나날들이었다.


"뇌를 공유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는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이 너무도 많았다. ‘종횡무진 시리즈’의 개정판이 완간되면 한국사에서 동양사, 서양사 전체를 아우르는 팟캐스트 방송을 3년 정도 하고 싶어 했다. 그 자신이 진행자이자 초대자로서 현실의 역사와 생각의 역사가 하나가 되어 펼치는 장구한 이야기를 떠들고 싶어 했다. 이 책을 이미 읽는 독자들이나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 모두에게 다시 이 책을 권한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지구 밖 어느 별에서 그가 진행하는 <남경태의 팟캐스트 종횡무진 인간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

 

남 선배는 ‘인문학의 대중화’만이 아니라 ‘독자의 인문화’를 위해 독자의 지적 수준을 결코 폄하하거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 어떤 독자의 사소한 질문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다. “뇌를 공유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런 농담을 자주 했고, 그런 시대가 오면 자신의 뇌를 가장 먼저 나에게 스캔해 주겠다고 유쾌한 웃음으로 약속하기도 했다.   

그가 떠난 그 순간부터 그가 몹시도 그리워진 이들은 안다. 그가 지금쯤 지구 밖 어느 별에서 한편으로는 <팟캐스트 남경태의 종횡무진 인간의 역사>를 준비하며, 또 한편으로는 ‘지구본 가지고 놀기’를 탈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놀랍게도 노트북을 다시 펼쳐 들고 ‘지구본 가지고 놀기’ 초고를 150매 더 썼다. 450매 미완의 원고는 우주의 어느 별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 별에서도 약속한 날짜에 그만이 쓸 수 있는 ‘완전한 원고’를 보내올 것이다.     




* 이 글은 [알라딘 16주년 기획 '대단한 저자']에 실린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의 글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대단한 저자>에서 글 전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 http://bit.ly/1SQav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