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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mbc 왕한의 세계는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대하역사만화로 완간, NLL 대화록 증발 사태에 주는 교훈 - 박시백 화백

2013/ 7/ 23 (화) MBC 라디오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대하역사만화로 완간, NLL 대화록 증발 사태에 주는 교훈

 - 박시백 화백


http://www.imbc.com/broad/radio/fm/worldnus/interview/?list_id=6572795


왕상한 >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하늘로 솟았을까요. 땅으로 꺼졌을까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국가기록원에 없다는 결론이 나면서 지금 정치권에서는 사초실종 후폭풍에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입니다. 여기서 사초라고 하면 공식적인 역사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말하는데요. 국가기록물의 존재 여부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요즘 기록물의 기록에서부터 보관관리에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조선왕조실록을 대하역사만화로 펴낸 박시백 화백과 말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화백님.


박시백 >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왕상한 > 2003년에 1권이었었죠? <개국>이 출간됐었고 10년 만에 이번 <망>편을 내신 건데요. 모두 20권이 더라고요.


박시백 > .


왕상한 > 준비작업이 상당 했겠죠?


박시백 > . 아무래도 이제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워낙 방대한 자료다 보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하고 하는 과정이 많은 시간이 소요가 됐고요. 그 외에도 뭐 참고자료라든가 필요한 고증이라든가 이런 것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왕상한 > 참고자료까지 보셨습니까?


박시백 > 아무래도 실록에 기초해서 한다하지만 현재 여러 가지 연구성과도 무시할 수가 없고 그리고 저 역시도 이제 실록의 어떤 얼개를 잡고 윤곽을 가지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미리 사전학습이 필요했었으니까요.


왕상한 > 실록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러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네요?


박시백 > , .


왕상한 > 그 작업을 하시면서 가장 역점을 두셨다고 할까요. 어떤 부분이었습니까?


박시백 > 초기에는 실록 자체보다도 물론 실록에 기초해서 조선왕조사, 조선정치사를 다룬다고 하는데 출발했는데요. 실록을 공부하다 보니까 우리가 의외로 실록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이거나 뭐 드라마라든가 이런 것을 봐도 생각보다는 실록이 많이 소개가 안 돼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우선은 실록에 있는 사실 자체를 온전하게 제대로 전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 부분에 각별히 좀 신경을 썼습니다.


왕상한 > 그렇군요. 그러면 보시기에 실록의 어떤 부분이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었을까요?


박시백 > 예를 들면 이제 우리가 잘 아는 황희정승 같은 경우에 황희정승 같으면 우리가 언뜻 떠오르는 게 두루뭉수리하게 너도 옳고 너도 옳다라는 식의 이런 태도, 또는 청렴결백, 이런 것으로 우리가 인상적으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실록에 나와 있는 황희정승에 대한 묘사는 전혀 다른 거예요.


왕상한 > , 그렇습니까?


박시백 > 가령 청렴결백과도 거리가 멀어서 여러 가지 뭐 뇌물사건 이런 데도 여러 번 연루가 되고 자식들도 그런 일에 자꾸 연루가 되고 또 두루뭉수리하게 와는 다르게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굉장히 자기 판단이 확고하고 결단력 있는 자세는 되게 많이 보여지더라고요. 예를 들면 이런 것에서부터 많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왕상한 > 그렇게 뇌물에까지 연루된 인물이 어떻게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도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과거 사초를 보면 사실 그 사초라고 하는 것이 오늘로 치면 정상회담의 회의록도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시백 > 그렇죠.


왕상한 > 말 그대로 국가기록물일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로 그 사소한 것까지를 자세하게 기록돼 있단 말이죠. 왜 그랬을까요?


박시백 > 그건 아무래도 당시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기록에 대한 태도 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제 기록을 후대에 남긴다고 하는 것 자체는 자신의 오늘에 대해서 어떤 행동에 대해서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거죠. 그런 부분이 아무래도 기록을 정확하게 남기는 그러한 출발적인 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왕상한 > 그렇군요. 그런데 사실 어떤 그 사실 관계를 보는 것은 어느 사람이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시백 > 그렇습니다.


왕상한 >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인 것 같은데 실록의 편찬은 사관이 담당했었죠?


박시백 > 그렇죠.


왕상한 > 그런데 보시기에 어떠세요. 정말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기술됐다, 이렇게 보십니까?


박시백 > 사관 역시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역시 그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 이런 것들이 당연히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나 후대로 가면 조선왕조가 당정에만 휩싸이게 되잖아요. 그래서 각각의 사관들도 해당한 당파의 일원이란 말씀이죠. 그래서 당연히 동일한 인물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 당파적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게 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 실록을 통해서 진실에 대한 어떤 접근이 가능한 것은 왜냐하면 이 사관들이 기록을 함에 있어서 해설이나 이런 것에서는 그런 당파성, 주관성을 개입시키는데 사실 자체에 대한 묘사는 아주 엄정하다라는 거죠. 아무리 자기가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올린 상소, 그가 임금 앞에서 하는 진언, 이런 것들은 있는 그대로 묘사를 하니까 후대인 우리가 충분히 당시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왕상한 > 그러니까 실록도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기술이 있고 그것에 대한 평가가 별도로 있는 모양이죠?


박시백 > 그렇죠.


왕상한 >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로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이런 평가가 있던데요. 얼마나 꼼꼼하게 기록했는지가 궁금하고요. 또 그것을 정말로 잘 보관해놨는지도 궁금한데 어떻습니까?


박시백 > 꼼꼼한 예는 뭐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는데요.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은 아무래도 이제 여러 가지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정치사가 가장 핵심적이거든요.


왕상한 > 정치사요.


박시백 > 그래서 왕과의 어떤 어전회의, 왕의 지시사항, 왕의 명령사항, 또 신하들의 상소, 또 신하가 상소를 올리면 왕은 그것에 대해서 비답이라고 해서 답변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런 답변, 이런 것들이 가령 동일한 사안에서 수십 통의 상소가 올라왔는데도 거의 대부분을 기록한다든가 이런 면에서 굉장히 마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보관을 말씀하셨는데 보관에 있어서도 일단 그 개국 초부터 조선왕조 같은 경우에는 춘추관에 사고를 둬서 여러 곳에 사고를 둬서 나누어서 보관했거든요. 동일한 것을. 그런데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에 있는 실록들이 전부 소실돼버립니다. 그런데 이제 전주사고를 지켰던 그 관리가 목숨 걸고 지킴으로 인해서 다행히 다시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것이 다시 복사가 돼서 오늘날까지 전할 수 있게 됐는데요. 그 이후에는 한 번 전쟁을 겪고 나니까 좀 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산속에다가 사고를 많이 설치하게 됩니다. 오대산, 태백산 이런데다가 거기다가 습도조절이라든가 온도조절, 이런 걸 다 고려해서 보관했다라고 하는 데서 결국 이제 그 500년 역사를 우리 손에까지 물려줄 수 있게 한데서 얼마나 투철한 보관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왕상한 > 사실 보관도 그렇고요. 뿐만 아니라 그 열람도 쉽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 사관이 작성한 사초는 왕도 볼 수가 없었다면서요?


박시백 > 그렇죠. 어찌 보면 그것이 조선왕조실록을 오늘의 가치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만든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왕의 접근성을 허용해버리는 그 순간부터 바로 왕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왕상한 > 그렇죠.


박시백 > 그런데 그걸 원천적으로 차단을 해버림으로 인해서 그런데 문제는 당시에는 왕조국가이기 때문에 왕에 대한 제동이 사실은 물리적으로는 되게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적어도 시스템 하에서 왕과 신하들 간에 암묵적으로 합의돼 있는 거죠. 그것은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이다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왕의 사초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이것을 통해서 기록이 엄정하고 집필이 가능한 이런 기록으로 남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되네요.


왕상한 > 그러니까 당대 왕뿐만 아니라 후대가 선대왕의 사초도 볼 수 없도록 금지가 돼 있었습니까?


박시백 > 금지, 그건 제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는데요. 가령 몇 대 임금 시절에 유사한 법안을 놓고 논쟁을 하게 될 경우에 유사한 게 있었는가를 연구하게 될 경우는 관련한 그 사관들을 보내서 그 부분을 발췌해가지고 연구하게끔 만듭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거예요.


왕상한 > 그렇군요. 이 지금 상황과 또 많은 부분이 비교가 되는 것 같은데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열람하는 그 과정에서 그 정치권의 공방도 아주 뜨거웠고 또 여론도 많이 엇갈리지 않았습니까?


박시백 > , .


왕상한 >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 왕이 사초를 볼 수 없다 라는 금기를 깨고 일어난 사건도 있었어요.


박시백 > 그렇죠. 우리가 연산군 시절에 무오사화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이게 어찌된 것이냐 하면 어떤 실록청 당상관이 기록을 뒤지다 보니까 자기에 대한 약간 좀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이 있어가지고 이게 이제 어떻게 수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김일손이라고 하는 그 사관의 기록이 문제가 됩니다. 어떤 게 문제가 되느냐하면 선대왕이었던 세조의 어떤 불경스러운 이런 것을 그대로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그야말로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기록해놓은 게 문제가 되면서 사옥이 열리게 되죠. 그리고 그 이후에 더 캐다 보니까 김종직이라는 사관의 스승뻘에 해당하는 사람이 쓴 조의제문이라고 하는 글이 그야말로 세조의 집권명분 자체를 정통성을 훼손하는 이런 걸로 받아들여지면서 크게 사화가 일어나게 됐죠. 그게 무오사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상한 > 500년에 가까운 역사가 기록되고 보존되는 것에 반해서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게 되면 2007년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일단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박시백 > .


왕상한 >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박시백 > 안타깝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지금의 이런 심각한 분위기보다 조금 다르게 보는 측면도 있는 게 제가 조선왕조실록을 그리는 와중에도 당대의 그런 어떤 이제 사초나 그 사관들에 대한 태도와 기록에 대한 태도와 지금을 비교해서 묘사한 컷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초기가 돼서 현대 우리에게 있어선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기록을 통째로 들고 가버렸다라든가 이런 얘기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에 그나마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 라는 이런 공감대가 퍼지고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저는 물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지만 그래도 진일보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왕상한 > 그렇군요. 사실 그 사초의 의미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의 중요함, 이 무서움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국가기록물을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최소한 조선시대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박시백 > , 고맙습니다.


왕상한 > 지금까지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시백 화백과 말씀 나눠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