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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화백이 말하는 '우리 시대로 불러오고 싶은 조선시대 인물'


박시백 화백, '우리 시대로 불러오고 싶은 조선시대 인물'을 말하다. 

 



일생 동안 경장을 외친 경세가, 율곡 이이 


지금 이 나라에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리더십의 보유자. '이이'라고 하면 대부분 16세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대학자를 떠올리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걸어온 발자취가 보인다. 실제로 그는 훌륭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준 정치가였다. 이이는 스물아홉 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면서 관직에 들어섰다. 건국 200년이 된 당시의 조선은 초기의 건강함을 잃고 쇠락해가고 있었다. 사화와 권신들의 전횡까지 더해져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나라의 재정은 고갈된 이 시기에 이이는 경연이나 상소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른 이들은 대개 원칙론적인 이야기에 머물렀지만, 이이는 그날의 교재가 무엇이었든지 기가 막힐 정도로 하나의 결론, ‘경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는 정치력이 뛰어나지 못했다. 이황, 조식의 학설이나 처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그는 그러한 생각을 그들의 제자들 앞에서 고스란히 말해버리곤 했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로서는 그런 이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유학자들의 미움을 산 것은 물론 왕도 이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왕의 기분을 고려해 듣기 좋게 말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상은 이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의 일관된 경장 주장은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주장으로 남았다. 젊은 나이에 조정에 나갔을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일관되게 같은 주장 을 내세운 이이. 시대의 문제를 직시한 정치인이라면, 개혁적 지향을 자신의 과업으로 떠안아야 한다. 이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환영받지 못한 현실주의자, 최명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재조명한 인물. 최명길은 당대 지식인으로부터 썩 환영받지 못했다. 친명사대 이데올로기가 강했던 분위기에 최명길이 주장한 청나라와의 화친은 동의받기 어려웠다. 청나라 임금 칸이 황제에 등극하자 조선은 어디 감히 오랑캐가 황제가 되려 하느냐며 결사반대한다. 척화는 근본 기치가 되었고 누구나 이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조정은 척화 분위기에 들떠 있기만 했지, 언제나처럼 대비책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제동을 건 것은 최명길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자 최명길은 자청해 적진으로 들어가 시간을 끌며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주화론을 주장해 청나라와 강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그가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찢어버리고 대성통곡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현실을 직시한 그의 노력 덕분에 출성항복을 하고도 왕조가 보전될 수 있었다. 1640년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을 통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로 끌려갔으나,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조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막았다.


최명길은 친청파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였고, 조선 왕실의 신하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화의를 일관되게 주창한 유일한 인물이고, 주화파라는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한 유일한 인물이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는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지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굉장히 모범적인 정치인의 표상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흐름에서는 최명길 같은 인물이 더욱 아쉽다. 친중이냐 친미냐 차원의 문제를 떠나 국제 정세의 변화를 냉철하게 읽고, 철저하게 나라와 국민의 이익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현실주의자가 필요한 시대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재상, 김육

 

대동법이 처음 실시된 것은 광해군 시절. 반발이 심해 전국으로 확대되지는 못했고 100년이 넘도록 번번이 중도에 폐지되곤 했다. 효종이 즉위한 이후 김육은 대동법의 확대 실시에 모든 것을 건다. 충청도, 더 나아가 호남으로까지 확대하려고 노력한 것. 김육은 수령과 부호들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백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수령들은 50여 명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50여 명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백성이 바라는 바를 안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육은 효종 2년에 충청지역에 먼저 대동법을 실시하고, 몇 년 뒤 호남으로의 확대 실시를 강력히 청한다. 찬성이 많이 늘었지만 반대도 여전했다. 이에 김육은 구체적인 여론조사 자료를 확대 실시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육은 끝내 호남에서 대동법이 시행되는 걸 보지 못한 채 79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만다. 백성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대동법의 실행을 위해 진력한 보기 드문 재상이었다. 김육의 죽음에 왕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대동법은 김육이 떠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 어찌하면 국사를 담당함에 김육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 이 포스팅은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방송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