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마지막 편지》를 펴내며
1
그는 혁명가를 좋아했다. 아니, 그 자신이 혁명가였다. 그는 시를 좋아했다. 아니, 그 자신이 시인이었다. 마흔 살의 혁명에 관한 기록인 그의 저서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의 서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타도, 구본형!’ 이것이 이 책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이다. 나는 나의 문화사, 이 개인의 실록을 통해 내가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다.’는 나의 비전은 먼저 이렇게 나에게 적용되었다. 내가 내 직업의 첫 번째 고객인 것이다.”
‘타도, 구본형!’의 자기 혁명은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이라는 시적 삶으로 매일 새롭게 태어났다. 그런 그가 불현듯,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2
20년 넘게 900여 종의 책을 펴내며 수많은 저자와 그보다 수십, 수백 배 많은 일로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책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나눌 저자가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든 과정을 한 번은 독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은 저자의 눈으로 다시 손보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저자 없이 책을 펴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머리말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초교지가 나오고 재교에 들어갈 즈음, 담당 편집자가 나에게 머리말을 청탁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좀처럼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평소엔 누우면 10초 안에 단잠에 빠져들지만 무언가 몰입하다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꿈속에서 현실보다 더 생생한 편집회의가 열리곤 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꿈속의 편집회의’에서 새롭게 부상한 제목으로 책을 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펜과 노트를 머리맡에 두고 자는 습관도 그래서 생겼다.
어느 날 꿈속이었다. 새벽에 출근해 노트북을 켜보니 저자에게 머리말을 청탁했던 내 메일의 답신으로 저자가 머리말을 보내왔다. 화들짝 놀랐다. 이럴 수가 있나! 지워질세라 재빠르게 메일을 열었다. 진짜 구 선배가 보낸 메일이었다. 받아쓰기 하듯 머릿속에 입력하며 읽어 내려갔다. 외우듯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생할 때 깨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긴장하지 않고 눈을 뜨면 깡그리 사라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깼다. 천만다행이다. 클릭과 함께 활자가 창에 뜨듯 기억이 났다. 그대로 받아 적었다.
“당혹스러웠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웬만한 표정쯤은 그려지는 사이지만 그때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을 걸세.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원고 청탁인가? 그것도 머리말을 말일세. 나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이들이 그동안 여러 일이 벌어졌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난리네. 새로운 곳에 조용히 적응하려는데 그대 때문에 한꺼번에 주목을 받아 부담스러울 지경이네. 쓸 말이 없네. 내 언제 자네 청탁을 거절한 적이 있었던가? 몇 번을 생각해보았네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네. 고맙다, 라는 말만 자꾸 반복된다네. 내 책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게. 내게 나의 독자는 ‘이름 없는 대중’이 아니었네. 그들 자신이 나였고 내가 그들이었네. 언젠가 이곳에서도 그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그들에게 고맙다, 라며 포옹으로 인사하고 싶네. 그들로 인해 나는 나를 다 쓸 수 있었다네. 아 참, 빠트릴 뻔했네. 이 책을 엮어주어 고맙네. 자네와 여러 권의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 고마움을 표시할 때마다 슬며시 빼버린 자네의 마음을 아네만 그래도 속으로는 섭섭했다네. 이번엔 그냥 두시게.”
3
재교지가 나올 즈음 아트디렉터 김태형 실장, 사진작가 하현희 씨, 그리고 담당 편집자 정다이 씨와 함께 저자의 자택을 방문했다. 중간에 구 선배의 유품 일부, 연구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전시된 합정동의 ‘크리에이티브 살롱 9’를 들렀다. 젊은 연구원 둘과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는 저자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표지 앞날개에 들어갈 저자 사진으로 적격이었다. 첫 유고집의 제목은 ‘마지막 편지’, 그러나 책은 저자의 삶처럼 밝은 빛을 담고 싶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만년필, 노트, 엽서, 모자, 명함, 이 모든 것은 저자가 생전에 애용하던 것들이었다. 절제해서 편집했다.
촬영하는 사이에 형수님께 ‘머리말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주셨다. 두 따님에게 머리말을 청탁하기로 했다. 출판사로 돌아오자마자 청탁의 서신을 썼다. 본문의 편지글과 어울리도록 머리말이 아니라 편지투의 여는 글로 청탁했다. 딸과 손녀가 고인이 된 저자의 머리말을 대신 쓴 사례는 많지만 불과 몇 개월까지 함께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머리말을 쓴다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며칠 후 머리말이 도착했다. 청탁을 받은 순간부터 생전 처음 직면한 그 짧은 머리말 쓰기가 일상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청탁하는 사람도 청탁 받은 사람도 모두 힘든 일이었지만 결과는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 과정의 경험 역시 좋은 기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의 머리말인 ‘여는 편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4
책의 말미에 편집한 ‘감사의 편지’를 정리한 날은 비가 몹시 내렸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기를 반복할 때마다 감정을 덜어냈다. 저자라면 30분이면 끝날 일이었다. 드문 일이지만 편집자가 쓰는 편집후기였다면 이 또한 1시간이면 마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덜어낸 원고에 대해 황서현 편집장과 정다이 편집자가 여전히 ‘감정의 과잉’을 지적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다시 고쳤다.
책이 나왔다. 따님이 책을 받아보고 메일을 보내왔다.
밤늦게 책을 받아보았습니다.
담백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저자 약력 부분에 실린 글도 좋았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밤에 소파에 앉아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대표님, 고맙습니다.
그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구해린 드림.
내가 답장을 보냈다.
구해린 님께,
저자가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면 편집자가 원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자의 속마음에서 파동이 일지요.
책이 막 나와 저자에게 보내면 마음에 들까, 혹 마음에 걸리는 건 없을까,
편집자의 속마음은 타들어갑니다.
해린 씨 메일 받고 마치 선배님이 “책 받았네. 좋더군. 애썼네.”
화답을 주신 것 같아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애쓰셨습니다.
김학원 드림.
5
4층 뒤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30대 중반,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읽고 여의도에서 처음 저자를 만났을 때부터 17년 동안 그는 나에게 훌륭한 저자였고, 좋은 선배였고, 때론 우정 어린 친구였다. 편집자는 모든 저자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난 그를 늘 ‘선배’라 불렀다. 그의 우정 가득한 눈빛과 태도가 나를 그렇게 부르도록 만들었다. 그가 떠난 4월의 어느 날 이후 난 애써 그의 부재를 거부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를 만들며 그의 떠남을 확인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저자 구본형 선배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3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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