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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팟캐스트 본편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무엇이든 물어보세요-"사초란 무엇인가?"



Q.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그리고 누가 사초를 만드는 것인지요? 아니면 실록을 작성할 때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기록을 어떻게 모으나요? 사초를 실록으로 만드는 기준이나 프로세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dshani

A.

사초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사초는 실록의 저변이 되는 자료입니다. 왕이 주관하는 회의 또는 왕의 행차에 사관들이 항상 배석해서 작성하는 초본 같은 기록물이지요.

사초 중 처음 작성된 것을 초초, 초초를 재정리한 것을 중초라 하고, 중초의 내용 중 최종적으로 선택된 내용을 정초라 한다, 중초 형태의 사초를 춘추관에 모아 두었다가 실록청 구성 후 최종적으로 선택된 정초를 실록에 기록합니다.

 

지극히 사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왕이 거동할 때마다 사관이 항상 배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신과 오가는 이야기, 왕의 행동과 발언, 신하가 올리는 상소와 상소에 대한 답,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의 내용 등이 사초로 기록됩니다. 그 외에도 사론이라 하여 사관의 개인적인 평과 또 사관들이 취득한 당대에 떠돌고 있는 풍문 중에서 의미가 있었던 내용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사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실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무오사화 같은 경우 실록청 당상관이 사관에게 관련 내용을 삭제하라는 청탁을 넣었지만 들어주지 않으면서 발단이 되었습니다. 사관이 청탁을 거부했을 때 실록청 당상관 혹은 총재관이라도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명분이나 권한은 없었고, 이처럼 사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사초를 만드는 것인지요?

 

사초를 작성하는 사람을 사관이라고 하는데 전임 사관은 총 8명이 배치됩니다. 본교 2, 대교 2, 검열 4명 이렇게 총 8명의 사관이 전임 사관으로 업무를 전담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왕이 죽고 나서 실록 편찬 시 설립되는 실록청에 소속된 모든 사람을 사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관 또한 사람인지라, 실록을 편찬할 때 어느 사관이 쓴 사초를 취사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실록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선조실록의 경우, 인조반정 이후 서인 집권 후 자신의 정치 세력에 유리한 내용으로 사초를 수정하였습니다.

 

 

실록을 작성할 때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기록을 어떻게 모으나요?

 

전임 사관이 기록한 사초 이외에 각 관청에서 기록한 업무일지인 시정기가 있습니다. 승정원의 승정원일기와 내의원의 내의원일기가 그것인데요. 이런 시정기에 기록된 중요한 내용이 실록편찬에 활용되기도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정기도 사초 중 하나가 됩니다. 이런 사초와 시정기의 내용 중에 중요한 내용을 뽑아 실록 편찬에 활용을 합니다.

실록 편찬 이후 사초의 내용은 지금의 세검정(洗劍亭) 근처에 위치한 홍제천에 씻어 폐기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고 하는데요. 내용이 씻겨 진 종이는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재생해서 재활용했답니다.

 

실록 편찬 이후 사초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모두 폐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현존하는 사초는 없는 것인가?

 

원칙적으로는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사초를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재 인조 때 쓰여 진 가장 사초 중 일부가 개인적인 보관 덕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실록청이 구성되기 전까지 개인적으로 보관하다 실록청이 구성된 후에 모두 제출해야 했는데. 위의 경우,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사초를 필사해서 남겨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초를 보관하던 사관의 관에 함께 묻힌 것을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발견된 사초는 실록 작성 시 사초가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