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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만나고 싶은 사람들/All about 人

어쩌다 보니 수능 특집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수다는 항상~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남자친구 이야기, 화장품, 직장 이야기까지 자신이 준비했던 카드를 다 준비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자리를 파하자는 의미다. 어쨌든 그 말의 이차적 의미를 파악했으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동시에대체 왜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든다. 친구들은 여고시절의 천진함과 낭만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들지만 나는 오히려 정작 그 친구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청춘의 그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야, 넌 기억 안나? 너 성적 안 오른다고 독서실 한 구석에서 펜으로 팔뚝 찌르며 자해했잖아. 그리고 넌, 성격 사납다고 내내 왕따 당했잖아. 그래도 그때가 좋아?”라고 말이다. 내가 너무 심한가?


사실 다시 생각해봐도 별로 심하거나 못된 생각인 것 같진 않다. 보통은 지난 날을 떠올리면서 "그때는 좋았어"라고 기억을 미화하기 마련인데 나는 더 안 좋은 기억이 많은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10대를 거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지옥 같은 일들을 겪어봤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들로 가득 찬 교실을 전두지휘 해야 하는 교사는 어떨까? 그런 교사들의지옥 같은심정을 담은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를 소개한다. 무슨 일만 벌어지면 학교와 교사 탓을 하는 우리 사회, 교육에 대한 냉소와 비난 속에서 교사는 딜레마에 빠진다.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방식의 수업을 준비하면 분란을 일으킨다고 욕먹고, 가만히 있다가 무슨 문제가 벌어지면 그러고도 교사냐고 욕먹는, 이래도 저래도 욕먹는 교사들의 애환을 담은 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육이란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만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연속적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설레야 한다. 그러나 지금 모두가 소진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만 하다. (중략) 우리 사회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모두 학교와 교육을 탓한다.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것도 학교의 문제고, 기업이 쓸모 있는 인재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학교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학교를 성토한다. 그러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학교가 바뀌면 정말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원 농담도.” (9~10)

 


이 책에는 아이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학교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좌절한 선생님들의 현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업 시간에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대뜸 폭력사건을 일으키는 아이들 때문에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면서도, 자기 속내를 풀어낼 길 없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요즘 아이들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는 선생님들의 면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성적과 대학입시에 대한 성과만을 요구하는 학교와 내 아이만큼은 뒤처지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 사이에 놓인 아이들은 그 시선의 사각지대 안에서 소외당하고 괴로워한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할 학부모들은 문제 상황에서 오히려 학교를 불신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니 그야말로 사면초가. 그렇게 망가지는 아이들을 어찌할 수 없는 선생님들은 아이들이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거나시장이 원하는 글로벌 인재로 자라는 일을 바라기보다는, 제발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얌전하게 졸업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저자는 학교가 그저 학생들의 육체적 생명을 돌보기만 하는수용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목적 없이 아이들을 가두고 생명을 유지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교사들 홀로 만드는 것은 아닐 터, 아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이 그만큼 위태롭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 학생이 성장한다고 할 때 그 성장은 연속적이다. 한 시기에 한 명의 단절적인 도움으로 도약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인간의 활동은 시공간적으로 공동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적으로 연속인 것은 듀이가 말한 것처럼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갱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 연속인 것은, 학생이 교사와의 일대일 관계를 통해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다른 학생들, 교사들, 그리고 주변 환경과 종합적으로 교류하며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의 성장을 측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누군가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학생의 성장을 단절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학생 자신이 성장의 주체가 아닌 교사 노력의 결과물로 대상화된다. 학생의 주체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과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대상화되고 개인이 노력한 결과물로 이해된다. 노동의 성과가 개별화되는 것이다. 개별화되지 않는 성과는 마치 인클로저 운동 시기의 공유지처럼 성과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253)

 


한 발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을 안고 사는 우리 사회. 세상이 미쳤는데 아이들이라고 멀쩡하겠어? 하는 농담으로 웃고 넘어가기엔 가슴이 무겁다. 이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그런 무거운 가슴에 한 짐을 더 얹는다. 이 책은 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 학교 현장이 얼마나망해가고 있는지보여줄 뿐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진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을 안고도 묵묵하게 레이스를 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우린 다 망했어라고 단언하는 저자의 논조는 저성장 사회의 젊은 세대가 거쳐 가야 할 암담한 미래를 그린 <아파트 게임>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두 저자가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를 보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하이데거는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이야기했고, 아렌트는어떤 것에 대해 철저히 논했다는 것,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결과라고 했다지 않는가? 결론도 대안도 없음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위한 공론과 정치는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학교는 망하더라도 가르치는 이가 아직 그곳에 있어야한다는 것.

 

책을 읽으며 행정 업무로 매일 야근인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학생 때부터 교사인 부모님 때문에 학생의 입장보다는 늘 교사의 입장에 서서 생각했던 애늙은이였다. 그래서 10대 소녀들로 가득찬 교실이 더더욱 아수라장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 애늙은이가 다 자라서는 10대 사춘기 소녀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우리 엄마 기가 찰 노릇일 거다. 여튼.. 수능날 이런 글을 올리고 나니 수능 추위가 더한 것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듯 수능 뒤풀이를 하고 있을 수험생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아이참